단서는 도장 하나, 이름 석 자뿐이었다. 이름 박봉우(朴奉羽). 아마도 대구나 경북 경산, 청도 어딘가에 살던 사람. 그리고 1950년 여름 갑자기 사라져 영영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비극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거기 있었다.
2007년 경북 경산시 평산동 폐(廢)코발트광산. 유해발굴 조사단의 눈에 도장 하나가 들어왔다. 진흙과 돌, 유해 조각들이 뒤엉켜 있는 곳에서 발견된 길이 3.4㎝의 나무도장. 도장집의 가죽은 이미 썩어 사라졌고, 도장집의 금속 테만 남아 있었다. 도장에 새겨져 있던 글자가 바로 ‘朴奉羽(박봉우)’. 1950년 그곳에서 숨을 거둔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만든 코발트광산은 폐광 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장소로 ‘활용’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부터 9월 사이, 이곳 코발트광산 갱도와 인근 대원골에서 최대 약 3500명의 민간인이 적법절차 없이 희생됐다.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 트럭에 실려와 희생된 사람들은 경북 경산·청도, 대구, 멀게는 충북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들과 요시찰 대상자들, 그리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총을 쏜 사람들은 경산·청도 지역 경찰과 경북지구 CIC(방첩대)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였다.
코발트광산은 과거 광부들이 드나들던 수평굴과 그들이 캐낸 광물을 올려보내던 수직굴로 이뤄져 있다. 군과 경찰은 사람들을 묶어 수직굴 입구에 일렬로 세웠다. 따다당! 총에 맞은 사람들은 수직굴로 떨어졌다. 그렇게 무수한 시신이 갱도 안에 쌓여갔다.
당시 상황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전해졌다. 당시 코발트광산 부근에는 일제강점기 때 사용하던 2층짜리 광산 사무실과 연병장이 있었고, 광산 사무실에는 CIC 경산 파견대가 주둔 중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구 방향에서 트럭들이 올라왔다. 한 대에 30~40명을 실은 트럭이, 많게는 하루에 8대 이상 왔다는 증언도 있다.
사람을 실은 트럭이 광산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여름에 시작된 학살은 초가을까지 이어졌다. 광산 내부가 아닌 주변 계곡에도 시신이 집단으로 매장됐다는 증언이 전해지지만, 그곳엔 지금 골프장이 들어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친구들하고 노는데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애비 없는 놈하고 놀지 마라, 빨갱이 자식하고 놀지 마라’ 하면서 데려가더라고요. (…) ‘니는 마 공부해봤자 취직 못 한데이. 느그 아버지가 빨갱이가 돼갖고’ 그런 소리 참 많이 들었습니더.”(코발트광산 사건 유족 인터뷰, 프레시안 ‘지금도 물속 어둠에 잠겨 있는 영령들’ 강변구 작가, 2022. 4. 30)
시간이 흘렀다. 코발트광산은 거대한 ‘빨갱이 무덤’으로 남았다. 빨갱이라 거기서 죽었는지, 거기서 죽었기 때문에 빨갱이라 하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을 알고도 말하지 못하는 세월이 길었다. 죽은 자의 주검들은 광산에 묻혔고, 산 자의 원한은 가슴에 쌓였다.
2001년 수평굴 문을 열자 쏟아져 나온 유해 수평굴 입구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막혔다. 그 벽을 터트리고 진실의 문을 연 것이 2001년. 무려 51년이 지난 뒤였다. 유족과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 수평굴 문을 열었다. 긴 세월 침묵 속에 잠들어 있던 진실을 마주할 시간. 굴속에서 유해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2001년과 2005년에는 민간 주도로, 2007년, 2008년, 2009년에는 국가 조사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유해발굴 조사를 벌였다. 진실화해위원회가 3년간 발굴한 유해만 약 370구. ‘박봉우’ 도장도 그때 다시 세상의 빛을 봤다.
도장만 발굴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수의 허리띠도 발굴됐다. 죄수복에는 허리띠를 찰 수 없었을 테니, 아마도 허리띠의 주인공은 재소자가 아닌 일반 ‘시민’이었을 거다. 고급 가죽 허리띠도 발견된 것으로 미뤄, 높은 계층의 사람들도 학살을 피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추도 많이 발견됐다. 그중에는 와이셔츠, 특히 여성용 블라우스에 다는 단추도 있었다. 양복을 입은 시민들,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이곳으로 끌려와 희생됐다는 증거다.
광산에서 무수히 발견된 매듭진 삐삐선(군용전화선)은 아마도 희생자들의 손목을 묶는 데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탄피가 누가 이들에게 총을 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유해발굴은) 그동안 공식적 기억에서 제외되었던 ‘비공식적 담론’을 활성화시켜 ‘사회적 기억’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 이러한 ‘사회적 기억 회복’ 역할은 결과적으로 ‘죽은 자’와 ‘억압된 기억’에 대한 기념과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영혼을 ‘정상적 궤도’로 돌려놓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한다.”(진실화해위원회 <유해매장 추정지 실태조사 및 유해발굴 중장기 로드맵 수립 조사용역 최종보고서>, 2022. 7. 19, 19~20쪽)
지난 3월, 14년 만에 유해발굴 조사 재개 지난 3월 23일 경산 코발트광산에서는 14년 만에 유해발굴 조사가 재개됐다. 과거 유해발굴 작업을 하면서 굴속에서 퍼낸 흙을 3000여개 포대에 담아뒀다. 그 안에 뒤섞여 있는 유해들을 골라내는 작업. 불과 일주일 만에 약 430점의 사람 뼈가 발견됐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사람 뼈 수백 점이 포댓자루에서 쏟아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 우리 부모님들 뼈가 펼쳐지니 눈물이 난다. (…) 그렇지만 이제라도 빛을 봐 다행이다.”(나정태 코발트광산유족회 회장 인터뷰, 평화뉴스 ‘민간인 학살 경산 코발트광산, 유해 430여점 발견…“신원미상, 수습 6개월 더”’, 김명화 기자, 2023. 3. 31)
2007년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굴된 도장 하나에서 시작된 ‘박봉우 찾기’. 조사관들이 백방으로 그 이름의 흔적을 쫓았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흙무더기 속에 뒤엉켜 있다가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는 저 뼛조각들 역시 원래는 모두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리던 것들이다. 3500개의 이름이 사라지고, 73년의 세월이 흘렀다. 흙무더기 속에서 뼛조각을 꺼내듯, 원한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꺼내 불러줘야 한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