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수상한 여자

양다솔 작가
2023.04.24

‘깜박했어ㅛㅇ!!!’ 자음과 모음이
제 갈 길을 가는 주홍색 말풍선.
그는 물건을 역 보관소에 맡겨달라 했다.
나는 받을 돈만 있지 낼 돈은 없었다. “저… 지갑이 없어 그러는데….”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않고 지나쳤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나는 오늘 지하철역에 가야 했다. 거기까지는 걸어서 7분 거리였다.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다. 세수할 필요도 없었고,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잠옷에 짧은 패딩 점퍼를 걸쳤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바지는 남색 바탕에 하얀 땡땡이 패턴이었다. 누가 봐도 잠옷 바람이었지만, 각자 갈 길로 바쁜 사람들이 가득한 역사에서 입고 있다고 한들 시선을 살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금방 처리될 거였다. 나는 서랍장과 벽 사이의 틈에 끼워둔 종이 쇼핑백들을 뒤적거렸다. 빳빳한 재생 크라프트지로 된 적당한 사이즈의 쇼핑백을 골랐고, 거기에 약속된 물건을 넣었다. 정해둔 시간과 장소에 약속한 물건을 들고 나타나는 것, 현대인들은 그것을 당근이라고 불렀다. 비타민A의 황제라고 불리는 선명한 주홍빛의 원통형 채소, 그런 것 따위는 잊힌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많은 현대인이 으레 그렇듯 나는 그 종이가방에 넣을 만한 젤리나 초콜릿 같은 하잘것없는 간식거리를 챙겨 넣었다. 그것이 소위 지금 시대에 필요한 센스였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는 새삼스러웠다. 이제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면 집을 아예 나서지 않는다. 집에서 창문마저 꼭꼭 닫고 있는 편이 나았다. 나가봤자 얻는 것은 균이요, 창문을 연들 얻는 것은 먼지뿐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면 10평 남짓이 되는 집 안을 마구 돌아다니면 됐다. 혼자서 산책을 나설 용기는 없었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며칠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종이가방을 앞뒤로 흔들거리며 거리를 활보했다. 거리에 늘어선 꽃나무들이 갑작스럽게 온난해진 날씨에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 있게 봄을 알리던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에게 “봄이니? 봄 맞니?” 하고 묻고 있었다. “나도 몰라.” 나는 무책임하게 대답했다. 오늘 나와 당근을 벌이기로 한 상대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깜박했어ㅛㅇ!!!’ 느낌표가 남발하고 자음과 모음이 각자의 길을 가는 그의 주홍색 말풍선은 딱 봐도 취해 있었다.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지하철 출구 앞에서 몇 분간 휴대전화를 붙잡고 전말을 파헤친 결과, 그는 회사에서 점심으로 급작스러운 회식을 하는 바람에 우리가 정한 시간과 장소에 오는 것을 홀라당 까먹었으며, 집으로 가버린 바람에 여기까지 다시 오는 데에는 한 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다. 그럼에도 물건이 필요하긴 했는지 그는 바로 내 계좌로 물건값을 입금했고, 얼마간의 돈을 더 입금해 그것을 지하철 물건 보관소에 맡겨주기를 부탁했다. 경우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엄밀하게 말해 공을 친 것은 아니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전개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의 매너 온도가 곤두박질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어서 이 예상치 못한 변수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 사물함을 찾았다. 빈칸을 찾아 보관 버튼을 눌렀다. 바로 그때 내가 가진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진 것은 휴대전화가 전부였다. 그것은 대부분 현대인의 삶에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역에서 그 사람에게 물건을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20분도 걸리지 않을 거였고, 예상대로 됐다면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철 사물함에 물건을 맡기기 위해서는 지급 도구가 필요했다. 나는 받을 돈만 있었을 뿐 낼 돈은 없었다. 역에는 마침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나는 거기서 잠옷을 입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방법이라도 있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러 갈래의 출구가 이어지는 지하철 내의 광장 한쪽에 편의점과 디저트 가게 몇 개가 있었다. 편의점으로 향했다. 괜히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넘겨 보았다. 사흘째 감지 않아 덕지덕지 눌어붙은 머리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기, 실례지만, 혹시 제가 계좌이체 해드릴 테니까, 지하철 사물함 좀 대신 결제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지갑을 두고 나와서요.”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생각했다. 남루한 잠옷 차림에, 칙칙한 패딩과 종이가방을 들고 떡진 머리로 궂은일을 하고 있는 편의점 알바생을 귀찮게 하는 꼴이라니. 솔직히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할 만한 구석이 어디에도 없었다. 알바생은 이런 사람은 겪을 만큼 겪어봤다는 표정으로 빠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요.” 그 표정은 내가 그 편의점에서 가장 비싼 것을 사고 나서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당근을 하러 나왔는데 안 나온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고요’라고 말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편의점을 나왔고, 다시 지하광장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명 한명 훑으며,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보려 했다. 얼굴에 조금이라도 상냥함이 서려 있는 사람, 걸음이 조금 여유로운 사람이 보이면 나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제가 지갑이 없어서 그러는데….”

정말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 도시에 사는 현대인이라면, 질릴 만큼 들어봤을 말이다. 나는 거리의 클리셰가 되어 있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차갑게 나를 스쳐 가는 그 얼굴들은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내가 가장 냉정하게 지나쳐가곤 했으니까. 다만 이렇게 쉽게 위치가 바뀔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내가 몇 년째 살고 있는 이 동네에서, 도시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던들 그걸 증명할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없었다. 캔 따개가 열린 채로 음료수를 권하는 할머니, 대뜸 길을 물으며 따라오는 여자, 변호사 같은 명함을 내밀며 돈을 빌리는 남자들 얘기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 길에는 수상한 사람이 많았고, 지금은 나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행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냥 집에 돌아가서 돈을 가져오자, 따위의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정확히 일곱 번째로 붙잡은 사람이 내 말에 멈춰 섰다. 말간 얼굴의 젊은 여자였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여자가 내 말을 들어주는 것에 내가 더 놀라며 말했다. “저 잘 살았고요, 앞으로도 잘 살고 싶어요….” 그게 내 이상함의 개성과 완성도를 높여줄 뿐 덜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속도로 지하철 사물함 대여비를 지불해 주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바로 그 금액을 이체했다. 거기에 얼마간의 돈을 더 보태서 보낼까 생각도 했지만, 왠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그날 내가 만난 가장 상냥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덕을 아무리 자랑해도 충분한 자격이 있었지만, 짐짓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멀어질 뿐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갚겠습니다. 그러나 이내 생각했다. 누구에게?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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