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책상에 놓인 휴대전화 진동이 울립니다. 초등학교 4학년 막내딸에게 걸려온 전화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고 “여보세요” 하니 “아빠, 지금 비와. 언제 와?” 합니다. 창밖을 보니 날은 벌써 어두워졌고, 도로를 달리는 차들 불빛 사이로 빗줄기만 흩뿌려지고 있습니다. “아~ 시간이 이렇게 됐네. 가야겠네!” 하니 “응” 하고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엄마가 해보라는 전화는 언제나 이렇게 간단히 끝이 나지만 저는 이처럼 맥락 없는 통화에서도 행복감을 느낍니다. 막내는 언제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38세에 결혼해 41세에 첫째를 보았습니다. 그후 2~3년 간격으로 3명이 더 생겨 49세에 딸 셋, 아들 하나, 4명의 아빠가 됐습니다. 아들 보려고 그랬냐고 여럿이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셋째가 아들이라고 얘기해줍니다. 그리곤 염려 반, 부러움 반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분들에게 저와 아내가 우리나라에서 애들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서 그렇게 됐다고 농담 같은 진담도 합니다. 덧붙여 “어떻게든 잘들 자라 주겠지요”라는 말로 양육과 관련한 걱정을 슬쩍 몰아내며 마무리합니다.
저출생 대책의 참담한 결과
얼마 전 대학 친구들과 만나 얘기하다 우리나라 출산율 문제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출산율 저하 속도를 걱정하며 입을 모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출생에 있어서 제 역할은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저도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출산율 변화, 인구정책을 살펴보고 우리 부부가 4명의 자식을 두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무지개 같을 수도 있는 변화를 공상해보기도 했습니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6명이나 됐습니다. 당시는 너무 가난해 살아가기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인구가 늘어가기만 하자 1961년부터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출산율이 1970년 4.53명, 1983년 2.06명으로 내려갔습니다. 정책 시행 22년 만에 현재인구 규모를 유지할 수 있다는 출산율 2.1명을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사회변화를 예견하는 명민한 정책결정자가 있었다면 그 연간에 산아제한 정책을 멈추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부는 계속 떨어지는 출산율을 방치했습니다. 13년 후인 1996년에야 산아제한 정책을 폐지했습니다. 그러고도 7년 후인 2003년에 비로소 저출생을 정책의제로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속도가 붙은 출산율 하락은 어떤 정책 수단으로도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 2018년에 우리는 출산율 0.9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1명 이하인 나라가 됐습니다. 2022년에는 0.78명이라는 최악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출생아 수도 1970년 101만명에서 2022년 24만9000명으로 50여년 만에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다들 인구절벽 상황을 실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출생 문제를 인식한 후 정부가 추진해온 출산율 제고 대책들은 참담한 결과만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금 지원인 양육수당 지급, 자녀장려 세제 도입과 세금공제 확대 등 세제 지원 정책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양육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추진한 아동 보육서비스 제공, 출산휴가 확대 정책 등도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습니다. 지난 15년간 투입했다는 280조원의 직간접 재정은 출산율 제고의 불씨도 만들어 보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280조원도 다른 선진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지원 규모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마저도 비효율적으로 사용됐고 많은 부분은 행정비용으로 쓰였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와 쉽게 변하지 않는 우리의 사회문화도 양육에 유리한 환경 조성을 방해했습니다. 무엇보다 힘들어진 현실과 사라져가는 희망이 우리의 저출생 대책을 확실하게 무력화시켰습니다.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사랑하는 자식들을 지금 같은 고달픈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은 부모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늦었지만 정부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2021년 제4차 5개년 ‘저출산·고령화 사회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기본패러다임을 ‘개인의 삶의 질 향상’으로 전환했습니다. 올바른 방향 전환이라고 봅니다. 금전을 지원하고 보육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필요조건이지만 아이를 갖게 하는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가난해도, 환경이 조금 나빠도 사랑을 바탕으로 가정을 이루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 부부도 존중과 사랑, 미래의 희망, 주위와의 행복한 연대 속에서 자연스럽게 4명의 아이를 가지게 됐습니다. 이런 사랑, 희망, 연대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도 이겨내는 힘이 돼준 것 같습니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삶의 질을 높이도록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해가는 일이 올바른 정책 방향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과 기술의 발전
저출생을 염려하는 근저에는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력 감소와 이어지는 연금·재정 고갈과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도 있습니다. 근래 전개되고 있는 기술의 발전(지식재산의 축적)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찬 견해들이 나옵니다. 최근 급속히 발달하는 ‘무인화 로봇’(인간처럼 자율적으로 동작하는 AI 로봇)을 사회 모든 분야에 확대 적용하면 르네상스 시대 이상의 문화발전과 근대산업 혁명기를 뛰어넘는 생산력 증가가 일어나 노동력 감소와 재정고갈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지금 정치권과 정부 앞에는 새롭게 펼쳐질 사회변화를 예견하고 현명하고 정교하게 ‘개인 삶의 질을 제고’할 수 있는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해 나가야 할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얼마 전 갑작스럽게 불쑥 내던진 대출금 탕감과 그를 둘러싼 정쟁을 보며 많은 이들이 허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보다 진정성 있게 대책을 수립하고 유연하게 집행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머지않은 장래에 더 많은 가정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을 마무리하며 그런 날이 빨리 오라고 기도해봅니다.
<조정목 세무사·세무법인 광화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