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대구부청(지금의 대구시청) 앞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소리쳤다. 그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있었다. 1946년 초부터 이어진 이 처절한 행렬에는 ‘기아(飢餓)시위’ 또는 ‘기민(飢民)시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쌀을 달라’는 외침이 바로 10월항쟁의 출발이었다.
1946년 9월 하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뒤, 10월 1일과 2일 대구에서 주민봉기의 형태로 10월항쟁이 발생했다. 시위는 10월 6일까지 경북으로 번졌고,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의 4분의 1인 약 77만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남한 전체에서는 약 230만명이 동참한 것으로 추산되는 10월항쟁. 그 출발점에는 ‘쌀’이 있었다. 영천성당의 프랑스 출신 신부 루이 델랑드(한국명 남대영)가 쓴 일기에도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공출 때 가혹하게 굴었던 경찰이 피살되고, 수많은 집이 약탈을 당했다. 이 시위의 원인은 미 군정의 과도하게 강요된 미곡 공출, 식량 배급이 이루어지지 않음, 철도운행의 열악한 노동조건, 그리고 독립에 대한 전적인 열망에 있다.”(매일신문 ‘[대구 시월] “더는 쌀을 구할 방법이 없다”…그해 10월은 민생고가 빚어낸 폭풍’ 2022. 10. 11. 재인용)
식량 부족이 부른 10월항쟁과 빨치산 토벌
미 군정은 1946년 10월 2일 계엄령을 선포해 시민들을 진압했다. 대구와 경북에서 검거된 이들만 약 7500명. 검거한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 곳곳에 임시수용소를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진압에는 다른 지역에서 파견된 경찰, 미군, 국방경비대, 우익청년단 등도 투입됐다. 이들은 10월항쟁 참여자들을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경의 진압이 강경해지자, 10월항쟁 참여자 일부는 잠적하거나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이들에 대한 ‘토벌’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까지 이어졌다. 경찰은 이 과정에 빨치산뿐 아니라 주거지역에 있던 10월항쟁 관련자, 또는 남로당 가입자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때로는 10월항쟁과 무관한 지역 유지와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10월항쟁 관련자들을 향한 ‘척결’은 멈추지 않았다. 10월항쟁 관련자로 분류돼 형무소에 수감된 이들, 마을 대표나 지역 유지, 고학력 지식인 등 ‘요시찰 대상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1946년 10월항쟁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시기까지 10월항쟁 관련자라는 낙인은 토벌과 척결 그리고 ‘학살’의 명분이 됐다.
“오빠 박태덕(1919년생)은 대구 10월사건 당시 구장(시골 동네의 우두머리. 지금의 이장에 해당)으로 상부의 지시에 의해 사람들을 소집하는 일을 했다. 이후 그는 피신해 있다가 자수해 귀가했으나 1950년 7월 1일 경찰에게 강제연행된 뒤 돌아오지 않았다. 피신해 있던 오빠는 오랜만에 집에 온 뒤 당시 일곱 살이던 나와 함께 동구 밖으로 나갔다가 경찰에게 연행됐으므로 오빠가 연행되는 모습은 내가 직접 목격했다.”(<대구 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동생 박태자(1944년생)가 기억하는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다. 오빠 박태덕의 최후는 제4대 국회 자료(1960년)에 “10·1사건 혐의로서 본인이 자수 도중 경찰관에 연행, 1950년 7월 1일 대구 가창에서 피살”이라는 한 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같은 보고서에 실린 당시 ‘대한청년단’ 단원의 증언에도 ‘가창골’이 등장한다.
“대구 10월사건 때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잡아다 가두었다가 징역 살리고 나온 뒤에 6·25 나고 나서 경찰에서 다 잡아 죽였다. 당시 경찰관 친구들에게 얘기 듣기로는 명부를 보고 경찰서에서 잡아서 주로 가창면으로 갔다고 했다. 대한청년단이 6·25 때 역할을 많이 했다.”
10월항쟁 관련자라는 이유로 ‘가창골’에 끌려와 학살된 민간인은 최대 1만명까지 추정된다. 그밖에도 경산 코발트광산, 청도 곰티재 등 여러 곳에서 학살이 이뤄졌다.
‘막연한 연관성’으로 학살, 국가가 인정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10월항쟁 관련자들을 향한 학살을 ‘국가폭력’으로 인정했다. 10월항쟁과의 ‘막연한 연관성’만으로 적법절차 없이 희생된 민간인의 존재를 약 60년 만에 ‘국가의 이름으로’ 확인한 것이다. 2016년 대구시의회는 ‘대구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오랜 세월 ‘폭동’으로, 때로는 ‘사건’으로 불리던 1946년 10월을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2020년,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가창골에 ‘10월항쟁 등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 들어섰다. 10월항쟁뿐만 아니라 군위·경주·대구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희생사건 등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한 총 6개 사건의 민간인 피해자를 추모하는 의미를 담아, 신원이 확인된 728명의 민간인 희생자 이름을 새겼다.
무덤도 묘비도 없이 버려진 이름들을 70년 만에 호명하는 탑. 남겨진 딸들과 아들들은 벌써 80~90대 노인이 됐다. 더러는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제삿날도 모르던 아버지들에게 제삿밥을 지어올리고 큰절을 하며, 유족들은 삼키지 못한 울음을 다시 한 번 토해냈다.
“위령탑 건립과 동시에 아버지의 유택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진짜 아버지를 보고 간다는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난다.”(강호재 대구 10월항쟁유족회 간사 인터뷰, 영남일보 ‘대구 10월항쟁 위령탑서 희생자 넋 기려’ 이명주 시민기자, 2020. 10. 14)
올해 가창골에서는 70년 전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진실화해위원회는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용역 착수보고회’를 열고 전국 6개 지역, 7개소에 대한 유해발굴에 착수했다. 그 가운데 가창골이 포함됐다.
1959년 가창댐 건설로, 대부분의 학살지는 수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해매장 추정지 한 곳에서 발굴이 진행된다. ‘쌀을 달라’는 처절한 목소리에서 시작된 항쟁과 학살, 은폐와 왜곡의 70년 세월. 가창골 땅이 소리 없이 품고 있던 진실은 어떤 모습일까.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