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의 일입니다. 엄혹했던 1980년대 초에 대학에 들어가 경제학 원론을 들으며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 경제학 대가들의 사상과 이론을 배웠습니다. 모두가 생소하고 경이로웠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사람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창시자인 앨프레드 마셜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였던 마셜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차가운 머리(Cool head)와 따뜻한 마음(Warm heart)’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함축된 4개의 단어에서 받았던 감동은 긴 세월이 지나서도 바래지 않고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셜이 언급한 지배 엘리트의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기득권층에게 유효한 권고입니다. 그가 의도한 세상이 사회권 강화와 복지제도 확대로 실현돼 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졸업하고도 한참 뒤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긴 고시공부로 열정은 식고 가슴도 메말랐습니다. 그런 저에게 새 출발의 문을 열어준 국세청에서 세원관리, 세무조사, 직원교육 등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모든 업무가 중요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근로장려금 지급업무가 기억에 남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열정을 다해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근로장려금과 코로나19
근로장려금은 간단히 말해 저소득층 가정에 얼마나 일을 했는가를 기준으로 금전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많이 벌면 그 금액에 비례해 지원금도 증가하는 구조입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는 달리 생계를 도와주면서 노동도 장려하는 근로연계형 소득지원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제도 도입을 논의하던 2000년대 초에는 시기상조라는 염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행정상 집행이 어려울 수 있고, 기존의 기초생활보장제도나 사회보험제도를 충실히 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왔지요. 이러한 염려를 극복하고 2006년에 도입됐습니다. 3년간 준비과정을 거쳐 2009년에 아시아 최초로 시행하게 됐습니다. 당시 운영 주체에 대한 논의도 있었습니다. 각종 지급근거 자료의 접근성과 업무역량 등을 고려해 국세청이 담당하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이때부터 국세청이 세금징수 외에 복지업무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근로장려금 지급은 시행 초인 2009년 59만가구 4537억원을 시작으로 2021년 497만가구 5조700억원으로 규모가 계속 커졌습니다. 시행 13년간 2926만가구에 25조6000억원을 지급했습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근로장려금이 기초생활보장 대상도 아니고 사회보험 혜택도 적어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저소득층을 도와주는 사회안전망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업무를 담당하는 소득지원국장으로 2020년 하반기에 부임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유능한 동료들과 업무를 집행하고 개선사항을 살펴보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회를 더 생산적이고 안정된 삶의 터전으로 만든다는 자부심도 없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때였습니다. 모두가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지요. 특히 자영업에 대한 광범위한 영업 제한으로 소규모 자영업자와 종사자들은 생계까지 염려하는 상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는 적절한 보호를 제공할 수단이 되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코로나19에 긴급하게 대응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고, 금융·세제지원을 확대했습니다. 국세청도 당연히 정부합동대응팀에 참여했고, 제가 일하던 소득지원국도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 제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복지제도 전반을 살펴보고 우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경제적 약자 지원과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 최선의 복지정책을 수립·집행해왔음을 알게 됐습니다.
선배 세대는 보수·진보 구분 없이 사명감과 리더십을 발휘해 4대 보험인 건강보험(1977년 도입·1989년 확대), 산재보험(1964·2000), 국민연금(1988·1999), 고용보험(1995·2000)과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2000)를 도입·확대하면서 사회의 기초안전망을 구축했습니다. 이 외에도 기초(노령)연금(2008·2014), 노인장기요양보험(2008), 근로장려금(2009), 학자금대출(2010), 무상보육(2013) 등을 도입했습니다. 선배들의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이 조화를 이루면서 서구 선진국에서 150여년에 걸쳐 이룩한 복지제도를 50여년 만에 구축하게 된 것이지요.
‘소득 파악’이 중요한 이유
한편 전례 없는 재난 발생은 사회안전망 구축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코로나19와 같은 예상치 못한 재난이 계속 생길 수 있어 이에 대해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 발생으로 상시적 소득 파악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정확한 소득을 적시에 파악해야 그것을 지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지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타의 복지정책을 합리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정부에서도 이런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세청에 소득파악태스크포스를 설치해 세부 업무를 추진했습니다. 그해 연말까지 이와 관련해 진행된 모든 일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근로장려금 업무를 하면서 우리 복지제도의 전개를 살펴보고, 미래 복지정책의 초석을 세우는 과정도 생생히 보게 된 것이지요. 소득지원국에서 짧았지만 소중했던 시간을 보내고 2021년 초에 대구지방국세청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해 연말에 퇴직했습니다.
정든 국세청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됐습니다. 최근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제가 몸담았던 소득지원국이 소득자료관리단(소득파악태스크포스가 2001년 정식조직화됨)을 흡수해 복지세정관리단으로 개편된다고 합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국세청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쳐 전국이 얼어붙었습니다. 추운 겨울은 계절의 순환에 의해 저절로 물러나지만, 우리 마음의 온기는 서로의 관심과 사랑으로만 피어오른다는 문구가 떠오릅니다. 새해에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주요 정책을 결정할 힘을 가진 국세청 사람들의 더 많은 분발을 기대해봅니다.
<조정목 세무사·세무법인 광화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