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ESG와 사실상 동의어인 ‘지속가능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는 2007년이다. ESG 사회에 앞서 지속가능사회가 당시 새로운 시대담론으로 급부상하던 시기여서 바야흐로 ‘패러다임 시프트’가 현실화하리라고 기대했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이명박의 취임(2008년 2월 25일) 직전에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맞물리면서 분위기가 돌변했다.
2007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자 당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주축으로 지속가능사회 의제를 발굴하고 시장에 압박을 가하던 필자를 포함한 ‘책임과 지속가능성’ 분야의 많은 사람이 분위기의 급변을 체험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전까지 그런 방향으로 어렵사리 변화가 시작되고 긍정적인 신호가 늘어났지만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발하며 경제가 나빠지자 모든 변화가 중단되고 과거로 회귀했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란 말은 일거에 생존가능성(survivability)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폭발적 ESG 담론, 낙관은 글쎄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듯하다. 진정성에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도 지속가능성을 한가한 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ESG가 지속가능성을 부분적으로 보완하고 부분적으로 대체하면서 ‘지속가능성+ESG’ 담론은 시대정신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중이다.
기후위기가 현실화하고 인류문명의 한계가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지속가능성은 그 함의에 부합하게 생존가능성을 포함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성과 생존가능성이 별개가 아니게 됐다. 지속가능성의 위기는 지구의 위기이자 인류의 위기이다. 지속가능성의 위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인류의 장래는 매우 암담하다. 지속가능성을 도외시한 생존가능성은 형용모순이며 지금의 생존을 배제한 지속가능성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지속가능사회 혹은 ESG 사회의 핵심이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은 지구 표면 평균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더 나아가 온도 상승폭을 1.5℃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파리기후변화협약 시대가 열리면서 지속가능성과 생존가능성은 명실상부하게 별개 사안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가 됐다.
기후위기 시뮬레이션으론 1.5℃는 물론이고 2℃ 목표를 달성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자칫 6℃까지 이를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이 재앙의 시나리오는 예측과 가정에 근거한 것이기에 반대로 얼마든지 낙관적 전망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국제사회의 상황과 거버넌스를 볼 때 부정적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보인다. 4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진화의 최종 단계를 모색한다는 얘기를 듣는 인류가 발전을 계속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멸종하는, 인류의 최후 단계가 되는 궁극의 비극을 모면하지 못하리란 비관적 전망까지 제기된다.
인류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다른 트랙을 찾아내 비관적 전망을 극복하는 다른 시나리오는 불가능할까. 경로를 바꿀 힘이 있는 대다수 사람은 기존 트랙에서 내리기를 싫어하고, 설령 내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해도 지금 당장은 옮아갈 새로운 트랙의 행태가 모호하기에 비관적 전망을 넘어서기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ESG를 내용으로 하는 지속가능사회로의 전환 트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할 책임을 지닌다.
솔루셔니즘은 솔루션이 아니다 탈석탄·탈원자력과 연결된 신재생에너지 체제를 근간으로 그린뉴딜을 통해 파괴적이고 약탈적인 경제체제를 보전과 상생의 새로운 사회체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원칙은 외형상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지만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각론은 미비하다. 새 힘은 미약하고 옛 힘이 여전히 강성한데, 주어진 시간은 짧다. 원자력을 둘러싼 풍경이 대표적이다. 새로운 원칙과 이상을 실현할 확고한 기술적·정치적 인프라가 아직은 없다. 따라서 낙관론은 현 시스템이 가진 저항을 과소평가하고 세상을 바꿀 힘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가능하다.
낙관론은 외견상 대항 논리로 보이는 근대주의를 연장하는 것에서도 모색될 수 있다. ‘포스트 이데올로기’로도 불리는 솔루셔니즘(Solutionism)은 기술이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비교적)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다. 근대주의의 최신판인 셈이다. 솔루셔니즘은 자본주의가 야기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세계화한 자본주의를 계속 작동하기 위해 이른바 ‘실용적’이라고 여겨질 합당한 해법을 제시하고 실행을 권유한다.
영국 정부에서 선호한 ‘넛지’ 같은 것이 솔루셔니즘의 비근한 예다. ‘넛지’ 기술은 해법에 집중하다 보니 문제의 원인을 방치하게 되고 그리하여 변화의 가능성을 결과적으로 차단한다. 결과론으로서 그 해법은 고통의 원인을 원천 제거하는 대신 진통제를 투여하거나 다른 데 신경을 돌려 고통을 잠시 잊게 만드는 방식이다. 현실을 상수, 개인을 변수로 설정하고 ‘민주주의’하의 개인이 현실에다 자신의 행동을 맞추는, 단순한 과업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솔루셔니즘이 기후위기의 해법이 되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는 주체에서 찾아진다. 기후위기의 당사자이자 기후위기 극복의 주체는 각성한 세계시민이다. 이들에게 솔루셔니즘의 기술해법은 주어지지 않는다. 즉 세계시민은 솔루셔니즘의 주체가 아니다. 솔루셔니즘의 주체는 현실적으로, 방대한 지식 및 활용네트워크, 인적·물적 자원을 용이하게 동원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며 결과까지 통제할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해법을 장악한 국가와 자본은 대체로 동일한 이해를 갖는다. 그것이 각성한 세계시민의 이해와 배치되기에 국가와 자본이 솔루셔니즘을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실질적 수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솔루셔니즘은 공항 화장실 내 남자 소변기에 파리를 새겨넣어 화장실 바닥에 튀는 오줌을 줄이는 데는 확실히 효과적으로 작동하지만, 지구 온도 상승 폭을 떨어뜨리는 데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솔루셔니즘의 결론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유명한 슬로건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에서 이미 수십년 전부터 내려져 있었다. 시장주의자들은 단호하게 “대안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시장을 지배하며 사회를 시장화하는 전략을 꾸준히 추진했다. 변기의 파리 문양이라는 지엽적 사안에 집중하는 사이에 세계는 시장에 완벽하게 포획돼버렸다. 시장사회는 기후위기 해결에 최적화되지 않은 시스템이라고 봐야 한다.
지평의 비극 솔루셔니즘을 포함해 현 체제가 기후위기를 극복하기에 적합하지 않음은 지평(地坪·horizon) 문제에서도 포착된다. ‘지평의 비극’(the tragedy of the horizon)은 2015년 9월 당시 영란은행 총재였던 캐나다 출신 경제학자 마크 카니가 제안한 용어다. 카니는 “환경경제학에서 대표적인 문제가 ‘공유지의 비극’이었다면 기후변화에서는 ‘지평의 비극’이 된다(Climate change is the Tragedy of the Horizon)”라고 말했다.
‘지평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기(cycle)와 지평(혹은 시야)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비즈니스와 정치가 내다보는 의사결정의 주기는 2~3년에 불과하다. 재정안정과 관련돼 봤자 이보다 조금 더 긴 정도다. 테크노크라트의 통제를 받는 각국의 중앙은행 등 정부 당국 또한 각종 규정에 속박돼 있어 (금융)정책 등을 펼치는 지평(horizon)이 좁다. 기후변화, 혹은 기후위기는 이 지평 너머에 위치하기 때문에 각국과 세계가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만일 기후변화가 당국에 의해 재정 및 금융 안정의 요소로 파악되기 시작했다면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가 된다는 게 카니의 설명이다.
카니의 지적대로 기후변화와 기후위기의 지평은 수백년에 걸쳐지지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 등 근대국가의 정책은 불과 몇년을 내다본다. 정책 일관성을 담보할 가장 강력한 안전장치라고 할 대통령의 임기는 한국을 예로 들면 기껏 5년이다. 탈석탄과 탈원전 같은 국가적 이슈가 선거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바뀌고 공약한 사항도 다가올 선거를 의식하게 되면 종종 변경되는 정치체제에서 정부와 관료집단이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애초부터 무망해보인다. 자본주의와 서구 민주주의를 국가 틀로 수용한 근대국가 체제의 본원적 한계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로 정권이 바뀌면서 정책방향의 변화 또한 뚜렷하게 목격된다.
인류문명이 ‘지평의 비극’을 여하히 넘어서느냐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이야기는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주주중심주의 vs 이해관계자중심주의 기업은 현재 이념전쟁의 최전선이다. ‘지평의 비극’을 포함해 인류의 생존과 번영은 기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기업이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기업의 정체성에 관한 논란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기업 혹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보는 관점은 다양하지만 크게 주주 이익 극대화를 앞세우는 주주중심주의 접근법,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루 균형 있게 추구할 것을 강조하는 이해관계자 접근법으로 나뉜다. CSR이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와 직결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CSR을 주주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전통적인 자유시장경제의 기업관에 근거를 둔다.
이 관점에서 기업은 계약을 바탕으로 한 경제활동의 기본단위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기업은 다수의 주주로부터 대규모로 자본을 조달한다. 주주는 기업에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권과 지배권을 가지고, 기업은 주주 이익을 실현할 책임을 지게 된다. 주주중심주의 접근법에서 CSR이란 이윤추구를 위한 경제활동·납세·준법이 전부가 된다.
미국 미시간 대법원의 포드사(社) 관련 판결(1919년)은 미국에서 주주중심주의 원칙을 확고하게 만든 계기로 평가된다. 포드가 이윤을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사용한 것을 불법이라고 밝힌 법원은 “사업회사는 근본적으로 주주의 이익을 위해 조직되고 운영된다”고 판시했다.
미국의 저명한 기업법 연구자 아돌프 A 베를은 법원의 판시를 더 정교화해 ‘위탁된 권한으로서 회사의 권한’(1931)이란 논문을 통해 주주중심주의를 옹호했다. 즉 회사는 주주의 재산이며 회사 경영자는 주주에 대한 수탁자라는 논리다. 주주중심주의는 널리 알려진 대로 1970년대에 밀턴 프리드먼에 의해 열정적으로 확산된다. 주주는 기업의 주인이기 때문에 기업이 창출하는 이익은 당연히 주주의 몫이어야 하며, 기업의 경영자는 단지 주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에 불과하기에 주주의 이익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경영하는 도덕적 책임을 지녀야 한다고 프리드먼은 주장했다.
주주중심주의는 그러나 진즉에 도전을 받았다. ‘하버드 법학 리뷰’ 베를-도드 논쟁의 당자자인 메릭 도드는 베를에게 직접 반격함으로써 주주중심주의에 맞서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를 내세웠다. ‘회사 경영자는 누구를 위한 수탁자인가?’(1932)라는 논문을 통해 기업이 주주의 이익창출만을 목적으로 존재한다는 베를의 견해를 강하게 비판했다. 도드는 당시 GE 최고경영자의 경영철학을 인용해 경영자는 주주에 대한 수탁자만이 아니라 회사에 대한 수탁자로, 주주 이외에도 고용인과 일반 공중 등 주요 회사 이해관계자에 의무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베를-도드 논쟁에 이어 기업의 사회공헌을 합법화한 미국 뉴저지 대법원의 판결(1953년)은 주주중심주의에 대한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의 의미 있는 승리로 받아들여진다. 이후 이해관계자 모델은 각각의 이해관계자 관계와 그 관심사의 넓은 범위를 반영하기 위해 수많은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게 된다. 환경 책임, 다양성, 차별금지, 회계투명성 등으로 CSR의 의미를 더욱 확장했다.
이해관계자 모델은 ESG 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ESG라는 주제는 노동자, 주주,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별로 정렬될 수 있다. ‘지평의 비극’을 넘어서는 데도, 기업의 의미 있는 변화를 끌어내는 데도 이해관계자 접근법은 긴요하다. 주주중심주의가 일종의 선형모델이라면 이해관계자중심주의는 순환모델이다. 21세기 경제와 사회는 불가피하게 순환경제로 진전하고 있다. 가장 친숙한 플라스틱인 페트병은 환경오염 주범의 하나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코카콜라 병을 떠올리면 된다. 폐페트병을 모아 섬유로 가공하는 등 그동안 다양한 업사이클링 노력이 있었지만, 아무리 훌륭한 업사이클링도 종국에 폐기물을 산출한다. 최종적 대안은 보틀 투 보틀(bottle to bottle)이다. 사용한 페트병을 수거해 다시 페트병으로 탄생시키는 무한 재생은 이론상 폐기물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 체제를 가동하려면 적합한 수거 및 세척 등 관련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 한국도 2022년에 보틀 투 보틀 대열에 합류했다.
지구를 살피는 비즈니스 밀턴 프리드먼은 “비즈니스의 목적은 이익이다(The Business of Business is Business)”라고 말했다. 이 말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자본주의에서 영리기업의 이익은 사회와 지구의 이익을 무시하고, 때로 훼손하고 약탈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바꿔야 한다. 영리기업 외의 다른 주체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프리드먼의 언명은 유효한 듯하다. 현 인류의 존재 방식이 지평의 차이를 공공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약탈과 훼손을 용인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지속가능사회, 혹은 ESG 사회는 기후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평화롭고 평등한, 그리고 자유롭고 번성하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할 때 많은 것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지평의 차이를 조정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기후위기는 정치 문제이며, 그렇다면 기후위기의 극복도 정치의 문제다. 그러므로 ESG는 투자용어에서 비롯했지만, 더는 투자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전면적인 정치와 급진적 운동의 용어가 돼야 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과제는 ‘근본적인 정치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ESG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자명하게 도출된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안치용 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