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유네스코는 왜 등재 유산을 삭제했을까

김용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선임전문관
2022.12.26

“의견 없으십니까?”, “8번 의안 채택합니다.”

의장이 엄숙한 목소리로 의사봉을 내리치자 회의장 곳곳에서 환희의 반응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무겁고 숙연하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지난 12월 2일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서 열린 제17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 총회에서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직후 관련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 김용범 제공

지난 12월 2일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서 열린 제17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 총회에서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직후 관련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 김용범 제공

지난 12월 2일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서 열린 제17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에서 벨기에 도시 아트(Ath)에서 열리는 가장행렬(뒤카스·Ducasse) 축제가 유네스코 유산목록에서 삭제됐다. 흑인 노예 캐릭터가 등장해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 후 3년 가까이 끌어 오던 문제가 결론을 찾는 순간이었다. 2003년 유네스코총회가 무형문화유산보호에 관한 협약을 채택한 이후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된 유산이 그 지위를 박탈당한 두 번째 사례다. 첫 사례는 2010년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됐다가 유대인을 비하하는 인형을 등장시켜 2019년 유산 목록에서 퇴출된 벨기에의 알스트 축제이다.

흑인 희화화 비판받은 뒤카스 축제

각국 대표단은 이날 뒤카스 축제를 단호한 어조로 비판했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종목이 어떻게 14년간 유네스코가 부여한 무형유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삭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인도 대표는 “검은색은 야만적이지 않습니다. 검은색은 아름답습니다. 검은색은 멋집니다. 검은색은 당당합니다”라고 말했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남서쪽으로 60㎞ 떨어진 곳에 있는 아트는 매년 8월 넷째 주에 거인 조각상을 만들어 한바탕 축제를 연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축제에는 얼굴과 손을 검정 물감으로 칠해 흑인 분장을 한 인물이 등장한다. 아프리카 추장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깃털 모자에 코와 귀에는 커다란 고리를 착용한 모습인데, 축제에 온 아이들에게 다가가 겁을 주고 급기야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행동을 한다. 가장행렬에 등장하는 이 캐릭터의 이름은 ‘야만인, 미개하고 포악한 사람’을 뜻하는 ‘소바주(le Sauvage)’다. 까맣게 페인트칠을 한 손이 닿으면 아이들 몸에 검은색 페인트가 묻기에 아이들에게는 소름 돋는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된다.

2005년 프랑스와 벨기에는 공동으로 ‘벨기에와 프랑스의 거인과 용들의 행렬’을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벨기에 아트에서 열리는 가장행렬도 여기에 포함됐다. 벨기에 시민단체는 아프리카계 주민을 풍자하고 흑인에 대한 혐오와 인종차별을 조장하므로 유네스코 무형유산목록에서 아트의 축제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2019년 유네스코에 전달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네스코 무형유산 지위의 박탈을 요구해왔다.

벨기에 아트 시는 축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의견청취를 한 결과 인종차별 의도는 없다는 입장을 내고 해당 축제에서 ‘소바주 캐릭터’를 유지해왔다. 당사국인 벨기에 정부는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 행위도 강력히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표명해왔다. 그간 유네스코와 무형유산 협약 당사국들도 당사자 간 대화로 원만한 해결을 장려한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위원국들은 소바주 캐릭터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유네스코헌장과 무형유산보호 협약의 정신에 위배되므로 더 이상 유네스코 무형유산 목록에 포함되는 걸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데 공감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유산의 구성 종목을 삭제한 결정이 모로코에서 열린 회의에서 나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모로코를 비롯해 노예무역의 아픈 역사, 제국주의의 인종혐오와 차별을 경험한 나라들은 사안을 중대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결코 쉽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던 셈이다.

‘벨기에와 프랑스의 거인과 용들의 행렬’ 유산의 하나로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분류됐던 벨기에 아트의 가장행렬은 결국 이번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유네스코 무형유산이라는 지위를 잃었다. 스위스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유네스코 무형유산 목록에서 벨기에 아트의 가장행렬이 삭제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바주 캐릭터 자체가 해당 축제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길 강하게 희망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위원회는 결의문에 이 내용을 추가했다.

프랑스가 신청한 ‘바게트 빵 문화와 장인의 제조법’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된 다음 날 아침 프랑스 대표단이 회의장에 바게트를 놓고 갔다. / 김용범 제공

프랑스가 신청한 ‘바게트 빵 문화와 장인의 제조법’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된 다음 날 아침 프랑스 대표단이 회의장에 바게트를 놓고 갔다. / 김용범 제공

유산 등재 쏠림 막으려는 유네스코

이번 제17차 정부간위원회는 유산 종목 삭제 의안 외에도 우리나라가 신청한 ‘탈춤, 대한민국의 가면극(Talchum, mask dance drama in the Republic of Korea)’과 북한이 신청서를 제출한 ‘평양랭면 풍습(Pyongyang Raengmyon custom)’ 등 모두 39건의 무형유산에 대해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를 승인했다. 또한 베트남이 제출한 ‘참족의 도자기 공예’ 등 4건의 유산에 대해 긴급보호목록 등재 안건 등을 채택했다. 북한은 이번 위원회에 2명의 대표단을 파견해 눈길을 끌었다. 쿠바가 신청한 ‘라이트 럼 제조 장인의 지식’ 등재 안건을 곧바로 채택하지 않고 다음 날 논의하는 것으로 당일 회의가 종료되자 북한 대표단은 회의장을 떠나지 못하고 회의장 입구에서 초조한 듯 담배를 태우며 상의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다음 날 오전 북한 대표는 우리나라가 제출한 ‘대한민국의 탈춤’ 등재 안건의 채택 결정을 지켜봤다. 등재 직후 우리나라가 준비한 탈춤 홍보영상이 회의장의 대형 스크린에 상영되자 주의 깊게 지켜봤다. 북한의 평양냉면 등재 명칭은 냉면이 아니라 북한식 표기인 ‘랭면’으로 표기됐다. 북한은 무형유산을 ‘비물질유산’이라고 부른다.

유네스코는 매년 무형유산 등재를 위한 심사 건수의 한도를 총 60건으로 묶어놨다. 특정 국가나 지역으로 유산 등재가 쏠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유네스코는 세계 각지에서 지역별로 무형유산이 골고루 등재되도록 힘쓰고 있다. 유네스코는 유럽(2개 그룹), 남미·카리브해 지역, 아랍,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등 6개 그룹으로 나눠 그룹 간에 무형유산 등재 규모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우리나라는 유네스코에서 등재 규모가 큰 나라로 분류돼 2년마다 1건씩만 등재가 가능하다. 유네스코에 무형유산 등재 실적이 없는 지역과 나라에도 등재 기회를 부여하자는 취지다. 보통 무형유산협약에 가입한 나라가 무형유산 등재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면 무형유산 심사기구에서 신청서를 심사한다. 그후 등재권고, 정보보완, 합의 어려움 등 3가지로 구분해 심사결과를 유네스코에 제출한다. 심사결과는 유네스코 정부간위원회에 상정돼 위원회가 최종 승인한다.

유네스코총회는 2003년 무형유산보호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협약 명칭(Convention for the Safeguarding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이 길어 ‘2003년 협약’(2003 Convention)으로 줄여 부른다. 무형유산보호 협약 채택 이후 매년 정부간위원회를 개최해 무형유산 대표목록과 긴급보호목록 등재를 승인하고, 2년마다 협약에 가입한 당사국이 참가하는 총회를 개최한다. 사람과 세대 간에 계승되면서 유산의 전승자와 공동체, 역사, 여건, 환경 등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무형유산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재창조되는 특성을 가진다. 그 까닭에 ‘살아 숨쉬는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공동체와 집단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인류의 창의성과 이를 바탕으로 발전해온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에도 기여한다.

유네스코 무형유산협약의 역할은 무형유산 보호에만 그치지 않는다. 유산의 보호를 위한 교육 증진과 인식 제고에 주목하고, 나아가 유산에 내포된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 증진, 문화 간 대화에 기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무형유산 협약은 협약에 가입한 나라가 무형유산 보호를 위해 적절한 정책적 조치를 하도록 요청한다. 이를 위해 무형유산 등재 신청과정은 물론 유산의 보호와 증진에 유산을 공유하는 공동체와 집단, 유산의 전승자들이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회의가 열리는 모로코로 가는 길은 멀었다. 우리나라에서 공항 직항 노선이 없는 모로코로 가려면 유럽 지역을 경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정세가 불안정해진 탓에 우리나라 국적 항공기는 러시아를 피해 가야 한다. 중국과 우즈베키스탄, 아르메니아, 오스트리아, 독일 등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국경 이남 지역으로 운항하는 바람에 운항 거리도 비행시간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보다 늘었다.

벨기에와 프랑스 축제 퍼레이드에 쓰이는 거인상의 모습 / 유네스코 제공

벨기에와 프랑스 축제 퍼레이드에 쓰이는 거인상의 모습 / 유네스코 제공

무형유산 전승자 보호에도 관심 높아져

모로코로 가는 여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분단으로 볼 수 없는 북한 땅을 비행기, 그것도 우리 국적기에서 바라본 경험이다. 국적기가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령도 등 서해 5도는 물론 황해도의 해안과 드넓은 들판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우리 국적기의 창밖으로 황해도를 조망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데다 평양냉면 풍습의 등재 결정을 앞둔 유네스코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터라 창밖의 풍경은 경이로웠다.

매사냥은 대한민국을 포함해 무려 24개국이 공동으로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한 유산이다. 회의장 야외 휴식공간에서 매를 눈으로 볼 기회가 있었다. 매를 데리고 온 사나이는 왼손에 매를 올려놓고, 오른손엔 스마트폰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매에는 관심이 없고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 ‘무형유산을 주제로 국제사회의 중요한 결정을 다루는 회의장 바깥에서 매보다 스마트폰이라니….’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매와 스마트폰이 서로 원심력이 작동하면서 때론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면을 통해 ‘유산의 보호와 발전’이라는 국제사회의 화두를 엿볼 수 있는 건 아닐까.”

유네스코 등재 유산을 잘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보호의 대상인 무형유산도 유산을 잇고 전승하는 사람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다. 유산 보호 제도가 유산 보호로만 그친다면 인류의 유산은 지속가능할 수 없다. 전염병과 디지털 전환, 일상에 스며든 인공지능, 기후변화, 전쟁 등은 무형유산 분야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기후변화와 전쟁, 코로나19 여파로 무형유산 공동체와 전승자들은 일터를 잃고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 전승자의 생계 보장을 위한 기본소득 지급 등 각종 지원정책에 여러 나라가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18차 무형유산 정부간위원회는 2023년 12월 아프리카 대륙 남부에 있는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에서 열린다.

<김용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선임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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