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거부한다

권재현 편집장
2022.12.19

2022 카타르월드컵이 종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국·일본·호주 등 아시아축구연맹 소속 3개국이 16강에 진출하며 파란을 일으켰지만 아성은 견고합니다. 결국 전통의 강호들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나마 축구 명문으로 불리던 팀들이 연달아 패배하며 물고 물리는 접전을 펼친 조별리그 결과에서 위안과 희망을 찾습니다. 다음 월드컵에선 아시아·아프리카의 선전이 더 이상 ‘이변’이 아니라 너무도 흔히 발생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편집실에서]영웅을 거부한다

삶이 팍팍할수록,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할수록 사람들은 영웅에 기댑니다. 대립과 반목이 도를 넘을수록 사태를 한 방에 해결해줄 초인을 목놓아 기다립니다. 실상은 간단치 않습니다. 갈수록 다원화되고 관심도 다양해지는 세상에서 이를 아우르고 통합하는 초월적 존재의 출현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목표입니다. 상대적으로 영웅의 탄생이 용이했던 과거에도 지나치면 결국 파열음을 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그랬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랬습니다. 스탈린이 그랬고, 마오쩌둥도 그랬지요. 한국의 군부독재도 그랬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질서를 짜면 구석구석이 그 영향권 아래 놓입니다. 일상 곳곳에서 영웅이 등장합니다. 사회를 빼닮아 ‘일그러진 영웅’도 많았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우선 구조적으로 영웅이 탄생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습니다. 기술 수준이 평준화되고 유행의 변화 속도가 워낙 빨라진 데 따른 현상입니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변화무쌍한 요즘 세상에도 BTS, 손흥민, 봉준호 같은 영웅들이 나타나지만 몇 곱절 더 변신하고 발전해야 지금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말까 합니다. 한 분야에 머무르며 ‘장기집권’하는 스타는 더 이상 나오기 어려운 시대가 됐으니까요. 그래서도 안 됩니다. 후배 세대가 쉽게 넘어서고 팬들의 관심과 응원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세상이야말로 창의와 혁신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과 인물이 부지런히 바통을 주고받아야 경쟁하며 발전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시진핑의 종신집권, 푸틴의 복귀, 재집권을 노리는 트럼프, 룰라의 귀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도는 듯합니다. 이렇게 인물이 없습니까. ‘고인 물’들이 속속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는 사회에서 무슨 변화와 미래를 논하겠습니까.

윤석열 정부와 화물연대의 대치가 장기화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탄광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진압하고 보수당 전성시대를 연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철의 여인’ 신화를 재현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위험합니다. 노동을 대놓고 적대시하는 사회에서 사회가 온전히 굴러갈지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영웅은 사상누각일 뿐이고, 그렇게 해서 얻은 승리의 기쁨도 한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찍어누른 불씨는 언제고 되살아나 더 큰 비용으로, 더 큰 후폭풍으로 돌아옵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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