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보도연맹 학살과 ‘고무신’···애도에 자격이 필요한가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2022.11.28

2007년 충북 청원군 ‘분터골’ 유해발굴 현장. 57년 만에 땅 위로 나온 고무신 한짝에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됐다. 밑창에 선명하게 찍힌 세 글자 ‘大同江(대동강)’. 고무신의 상표였다. 이 상표를 추적하면, 57년 전 이 고무신을 신고 분터골까지 와서 이곳에 삶의 마지막 발자국을 남긴 ‘그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1950년 7월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사망자들을 기리는 원혼비가 박혀 있다. / 최규화 전 주무관

1950년 7월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사망자들을 기리는 원혼비가 박혀 있다. / 최규화 전 주무관

‘대동강’의 정체는 1956년 발간된 <충북연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당시 청주에 있던 ‘청주합동고무신공업사’의 상표. 1948년 개업한 이 공업사는 직원 약 160명 규모의 큰 공장이었다. ‘大同江’ 세 글자가 찍힌 고무신 한짝은 분터골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청주 주민이거나 그 가까이에 살았을 거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물증’이 됐다.(<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2008)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에 있는 분터골.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4일부터 11일까지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과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이 경찰과 헌병대, CIC(방첩대) 등에 의해 이곳 분터골에서 학살됐다.

“후퇴하기 전에 죽였어. 옛날 트럭이야. 하얀 윗도리를 입었는데 형무소에서 끌려나온 것 같더라고. 경찰들이 장총 들고, 정장 모자(턱에 끈이 달린 모자) 쓰고, 죄 엮어서 오더라고. 줄로 엮어서 20명씩을 한데다 묶었어. 그러니까 앞에 있는 사람 허리를 묶으면, 또 묶고, 또 묶고 해서 도망을 못 갔어.”(<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제2권·진실화해위원회·2008)

학살 목격자 이재우 옹(가명·당시 15세)이 기억하는 1950년 ‘그날’의 풍경이다.

2006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는 300~400명의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트럭에 실려가 분터골에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 약 700명도 같은 곳에서 학살당했고, 시신을 흙으로 덮어 가매장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청주·청원지역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수는 약 1500명. 그중 분터골에서 희생된 수만 약 1000명에 이른다. 분터골은 충북지역 최대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다.

추정 희생자 1000명… 충북지역 최대 학살지

1949년 좌익 전향자를 ‘바른길로 이끈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중에는 실제 남로당원도 일부 있었지만, 당국의 강요로 강제 가입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보도연맹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집명령에 바로 응했고, 구금 중에도 탈주하지 않고 석방을 기다렸다.

“거기(분터골) 가니께 경찰관들이 보초를 서 있어. 고 언저리에 수천명이 피란민이 서 있어. 못 가게 막았나봐. 하거나 말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개 7부쯤인가 8부쯤에 올라갔더니, GMC 자동차 두 대가 청주 쪽을 앞을 두고 서 있더라고.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다 끝났어요’ 하길래, ‘하이고 살릴 사람이 있는데’ 그랬더니 ‘할 수 없죠’ 그래. 드문드문 총소리가 나는데, 저게 확인사살 하는 거라고 그래.”(<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당시 청주에서 우익 청년단체 활동을 한 장풍연 옹(가명·당시 25세)은 ‘분터골에 가봤느냐’는 조사관의 물음에 위와 같이 답했다. 57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생생했다.

그날의 총소리가 남긴 참상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과 2008년 진행한 유해발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2007년 118구, 2008년 214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M1·카빈총 소총의 총탄과 옷감, 단추, 고무줄, 신발 등이 출토됐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분터골 학살 조사결과를 포함해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65명. 92%가 20~30대였다.

“여기(분터골)가 충북 도내 최대의 학살지라면 저거(안내판) 달랑 하나 세워놓는 게 아니라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현장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만들어놔야 하는데…. 몇십억 들여 위령비를 세우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전혀 안 하는 거예요. (돈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예요, 의지의 문제.”(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유튜브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찾아서-분터골’ 2022. 1. 14.)

직접 분터골을 찾아가 보니 박만순 대표의 분노가 이해됐다. 지난 10월 30일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가 주최한 ‘예술과 함께하는 한국전쟁 기억여행’ 답사에 함께했다. 국도변 식당 앞에 차를 대고, 차가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걸어 올랐다. 200m쯤 걸으니 좁은 길조차 아예 사라졌다. 펜션촌을 짓느라 세워놓은 낮은 옹벽을 타고 올라 현장에 도착했다.

무성히 자란 풀밭 사이 진실화해위원회 안내판이 보였다. 그 발치에는 높이가 두뼘 정도 될까,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가 세운 작은 원혼비가 살짝 기울어진 채 ‘박혀’ 있었다.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분터골의 오늘은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했다.

마침 그날은 10월 30일. 자고 일어난 사람들의 귀에 이태원 참사의 소식이 들려온 날이었다. 답사에 참가한 사람들도 충격과 놀라움, 추모와 애도의 말들을 서로 나눴다. 그리고 다시 이곳 분터골로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한없는 비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다룬 기사에는 늘 ‘빨갱이라서 죽었는데 무슨 애도를 하고 무슨 보상을 하나’ 하는 댓글이 달린다. 학살의 가해자인 국가의 태도 또한 다를 바 없다는 점은 충북 최대 학살지, 분터골의 ‘폐허’가 말해주고 있다. 아직도 이 사회는 분터골의 원혼들을 향해 ‘애도 받을 자격’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72년간 그래왔듯이.

1950년 당시에는 없었을 것 같은 어린나무에 가지고 간 실을 걸어두고 왔다. 죽음의 땅을 뚫고 올라온 새로운 생명. 실은 기억과 감정을 엮고 잇는다. 분터골, 그날의 참극과 오늘의 애도가 이어지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원한과 내일의 화해가 이어지기를.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6월 말부터 충북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자들이 청주경찰서 경찰과 헌병대, 청주CIC에 의해 경찰서와 각 지서, 형무소 등에 소집·구금됐다가 7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청원군과 보은군 일부 지역에서 사살된 사건이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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