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폭력과 노동자의 죽음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2022.11.21

노동자의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듯이, 이윤을 위해 노동현장의 안전을 희생하는 데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어떻게 인간의 생명을 소모품처럼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소모품은 일종의 비유인가 아니면 실제 사실인가.

시민들이 서울 서초구 양재동 SPC그룹 본사 앞에 설치된 ‘추모의 벽’에 SPC 계열 제빵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 A씨(23)를 기리는 글을 남겼다. / 한수빈 기자

시민들이 서울 서초구 양재동 SPC그룹 본사 앞에 설치된 ‘추모의 벽’에 SPC 계열 제빵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 A씨(23)를 기리는 글을 남겼다. / 한수빈 기자

폭력과 사고 폭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쟁이나 살인이다. 인간이 물리적 힘으로 다른 인간의 신체를 파괴하고 생명을 빼앗는 행위, 여기에 폭력의 원초적 의미가 있다. 교통사고도 인간의 신체를 파괴하지만, 폭력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폭력과 사고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의 의지가 개입됐다면 폭력, 아니라면 사고라고 답할 수 있다. 사고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것, 따라서 인간이 완벽히 막을 수 없기도 하다. 여기에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이 전제돼 있다. 즉 폭력은 인간의 행위이지만, 사고는 자연적 사건의 일종이다. 자동차는 인간의 발명품이지만, 교통사고는 길 가다 벼락을 맞거나 실수로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사고가 인간의 책임과 무관하지는 않다. 교통사고는 자연적 사건에 가깝지만, 경우에 따라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이 도구와 기술을 사용하는 도중에 발생한 사고에는 예외 없이 인간적 요인과 자연적 요인이 모두 개입한다. 문제는 인간적 요인을 특정하고, 책임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점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어디까지가 자연재해이고, 어디서부터가 인간의 책임인가.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것 대부분에서 비슷한 질문이 제기된다.

더 큰 어려움은 책임이라는 개념 자체에 있다. 전통적 책임 개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시공간적 인접성을 전제한다. 인간적 요인과 자연적 요인이 뒤얽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경우,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예컨대 오늘 우리가 배출한 탄소가 수많은 사건의 연쇄를 거쳐 수십년 후에 남태평양 섬나라의 소멸을 초래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책임의 개념 자체를 재구성한다. 문화와 자연, 정치와 과학의 분할을 폐지하려 했던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작업이 중요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 있다.

산업재해에서도 같은 어려움이 발견된다. 노동현장은 다양한 자연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의 복합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여러 요인을 서로 구별하고 각 행위자의 책임 범위를 분명히 나누기가 쉽지 않다. 기업은 이러한 어려움을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산업재해를 노동자의 실수에서 비롯한 자연적 사건으로 몰고 간다. 애초에 산업재해라는 표현 자체에 이런 경향이 반영돼 있다. 서구권에서는 흔히 노동사고(work accident) 개념을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노동’ 대신에 ‘산업’을, ‘사건’ 대신에 ‘재해’를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재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재앙으로 말미암아 받는 피해. 지진, 태풍, 홍수, 가뭄, 해일, 화재, 전염병 따위에 의하여 받게 되는 피해’, 즉 재해란 인간적 사건보다는 자연적 사건을 부르는 말이다. 산업재해는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자연적 사건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새로운 폭력 방금 말한 노동현장의 특징을 좀더 생각해보자. 안전관리 비용, 노동시간, 투입된 노동자 수, 사용하는 재료와 물질, 작업과 공정 방식, 인적 조직의 구조, 고용 형태, 하도급 구조 등 수많은 요인에 따라 노동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달라진다. 기업은 그 확률을 예측하고 필요한 판단을 내린다. 그 예측은 과학적 근거와 엄밀한 방법에 기초할 수도 있고, 관리자의 단순한 예감에 의존할 수도 있다. 또한 기존 노동사고에 대한 인과 추론에 근거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예측 없는 노동관리는 없다. 주먹구구식 운영 역시 나름의 예측에 기초한 판단이다.

중요한 것은 사고 확률을 영(0)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예측의 목표는 그 확률을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생명 자체를 하나의 양적 크기로 표현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생명을 양적으로 다루는 기술은 현대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요소다. 물론 그 기술 자체를 좋다 나쁘다 평가할 수는 없다. 국가는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와 코로나19 사망률의 관계를 예측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망률이 높아지는 선택을 한다. 오로지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전략은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업이 인간 생명의 가치와 사물의 가치를 양적으로 비교할 때다. 기업의 판단은 대략 두가지 극단 사이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주어진 조건에서 사고 확률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윤을 위해 그 확률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두 번째에 가까운 기업에서 노동사고가 발생했다고 하자. 사고의 책임자를 특정하는 게 가능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또 사고의 원인이 인간의 잘못일 수도, 예측불가능한 자연적 요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기업은 사고 확률에 대한 예측과 특정한 판단을 했다. 그에 기초해 운영하던 노동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업의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물론 이때 책임은 법적 책임도 단순한 도의적 책임도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해야 할 개념이다).

노동사고가 끊이지 않는 한국의 기업들은 방금 말한 두 번째 극단에 가까운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고의 빈도 그 자체보다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기업 운영에 결정적 타격이 없는 범위 내에서 사망률을 최대한 높여서라도 더 많은 이윤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 아닌가? 이러한 판단은 인간의 생명을 소모품의 하나로 간주한다. 소모품은 은유가 아니라 그들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정확히 표현한 개념이다. 인간 생명의 가치를 비용으로 측정하는 순간, 인간은 실제로 하나의 사물이 된다. 그것은 사고팔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버리거나 파괴할 수도 있는 사물이다.

인간이 사물이 된 곳에서 노동자가 죽었다면, 그것은 사고인가 폭력인가. 폭력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물론 전통적 의미의 폭력은 아니다. 총과 칼을 든 인간이 아니라 확률을 계산하는 인간의 폭력이다. 그것이 초래한 죽음은 자연적 사고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에 담긴 인간의 의도는 쉽게 은폐되지 않는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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