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상에 선한 폭력은 없습니다

김정수 시인
2022.11.21

김승일 시인의 신간시집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고백하자면,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동생과 싸워 회초리를 들었는데, 자기 잘못이 아닌데 왜 맞아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지요.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요. 아이들은 싸우며 크는데 그것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회초리를 든 것이지요. 아이들을 처음 키워보는 초보 아버지의 실수담이지만, 늘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있습니다. 세상에 선한 폭력은 없습니다. 정당화될 수도 없고요. 폭력은 그 자체로 나쁘기 때문입니다.

김승일 시인(위)과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표지

김승일 시인(위)과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표지

폭력에 저항하는 시 운동
김승일 시인(1981~ )의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를 읽기 전까지 폭력은 음지의 산물인 줄 알았습니다. 낮보다는 밤, 정면보다는 뒷면, 탁 트인 곳보다는 후미진 곳 등 보는 눈이 많은 데서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잖아요. 아니더군요.

시 ‘D의 몽타주’에 의하면 “밝은 곳에서도/ 폭행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자는 D”라고 합니다. D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한낮 “사람이 많은 광장”에서도 폭력이 이뤄졌고, 시인은 역설적으로 “밝다는 원리는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몽타주가 암시하듯 직접 폭력이 아니라 “정오의 햇빛 속에서” 가해자를 맞닥뜨린 상황입니다. 추행하고 착취한 자를 “밝은 곳”에서 마주치는 건 공포입니다. 가해자는 당당한데 오히려 피해자가 “폭행을 당한 기억으로” 죄지은 양 몸을 피합니다. “어둠의 구석으로” 피한 후에야 “D의 실명”이 떠오르고, “훼손된 명예를 복구하기 시작”합니다. 단 한 번도 미안해한 적 없는 D가 “나를 찾아와” 소름 끼치게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작 한 개의 네잎클로버”를 위해 “더 많은 클로버”를 밟는, 혼자의 행운을 위해 다수의 행복을 짓밟은 D와 같은 가해자들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때린 사람 얼굴”(이하 ‘얼굴이 안 잊혀’)은 잊히지 않습니다. “폭력에 저항하는 시 운동”을 하는 시인이 얼마 전 TV에 나왔을 때 아나운서가 “가해자 만나면 한마디 하실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지금도 못할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그가 무대 뒤에서 웃으며 나타날 것 같고, 폭력의 잔해가 그대로인데 용서라는 말이 도저히 안 나올 것 같다고 합니다. 가해자를 만나면 “불안과 공포마저 차렷 자세”(‘시인의 말’)가 된다고 합니다.

폭력은 당하는 순간뿐 아니라 오랜 시간 심한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시인은 이를 “비에 한 번 흠뻑 젖은 책들은 복구가 되지 않는다”(이하 ‘나보다 키가 작은 9반 1번’)라고 표현합니다. 한 번 폭행을 경험한 사람은 그 전의 삶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책 모양이 변할 뿐 아니라 “책장과 책장이 들러붙어” 제대로 넘길 수 없고, 내용을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책장 하나가 젖으면 다른 장으로 물이 스며들 듯, 폭력은 삶의 페이지를 서서히 물들입니다. 삶에 스민 폭력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젖지 않도록 젖은 책장과 마른 책장을 분리하거나 젖은 책장을 햇볕에 말려줄 사람이 곁에 없다면 책은 다 젖고 말겠지요. 물에 흠뻑 젖은 책은 물(폭력)의 흔적을 내면 깊숙이 감춘 채 안 그런 척 위장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폭력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습니다.

군대·학교 폭력의 심층, 시로 승화

첫 시집 <프로메테우스>에서 “오늘날 공동체를 파괴적으로 지탱하는,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폭력의 심층을 파헤쳤다”(김수이 문학평론가)는 평가를 받은 시인은 두 번째 시집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에서는 군대에서의 가혹행위와 성폭력뿐 아니라 대학원에서의 갑·을 관계, 중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따돌림과 괴롭힘 등 다양하고도 구조적인 사회문제에 온몸으로 저항합니다. 학교와 군대의 구조적 폭력을 살피면서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예리하게 살피는 한편 폭력의 피해와 기억을 벗어날 수 있도록,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도록 응원합니다. 학교와 군대의 폭력 피해자이기도 한 시인은 폭력이 어떻게 시작되고, 번져가고 되풀이되는지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고발합니다. 시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방관과 침묵도 공범이라는 인식하에 우리에게 반성과 화해를 요구합니다.

시집 첫머리에 놓인 시 ‘김 병장의 제안’은 시인이 이병 때 당한 폭력이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군홧발로 모가지”를 밟힌 황 일병이 헌병대에 신고한 후 다른 부대로 전출 가자 김 병장은 신고하면 “진짜 죽여 버릴 거”라 겁박합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불 꺼진 부식창고”에서 발가벗고 선 채 “통증과 수치”를 견디게 합니다. “화이바로 내 머리”를 내리치고, 주먹으로 무수히 때립니다. 김 병장은 “결정적인 순간”에 “너 같은 새끼를 진짜 죽일까 봐” 담배를 피운다고 합니다. “죽지 않기 위해 울었다”는 김 이병은 “나는 왜 견딜까” 질문을 던집니다. 김 병장 말고도 최 병장, 박 병장, 이 병장과 송 상병, 구 상병, 김 상병, 신 일병, 천 일병, 김 일병이 “구타와 가혹행위에 가담한 자 방관한 자 계획하고 부추긴 자”(이하 ‘영외자 숙소 열고 나와 화장실 열고 나와 보급소 도망가는’)가 나옵니다. 이들은 다 “미로에 들어갔다가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자 나오지 않은 자”들입니다. “저항과 자유를/ 기절시킨 채”(‘대학원, 김뱀이 먼저 와 있었다’) 제대해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하필 김 병장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악연의 연속입니다.

“커터칼이 부러져 버린다// 몇 번 긋지도 않았는데” 시 ‘인간이 되어 가는 저녁’의 전문입니다. 폭력을 견디지 못한, 그 후유증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당연히 자해하지 말고 폭력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쉬쉬하며 숨기지 말고 밖으로 드러내 같이 방법을 찾고 치유하자는 것이지요. 시인은 잊지 않습니다. 폭력을 고발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폭력이 있었던 자리를 자꾸 쓰다듬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요.

◆시인의 말

▲불친절한 오후가 향기로울 때
배정숙 지음·북인·1만원

[김정수의 시톡](15)세상에 선한 폭력은 없습니다

제발 슬픔과의 적당한 화해로, 하루하루 무심의 낱장들을 떼어낼 수 있기를. 맞서서 대들면 가슴이 더 아파지니 말이다.

▲겨울이 복도처럼 길어서
이기린 지음·b·1만2000원

[김정수의 시톡](15)세상에 선한 폭력은 없습니다

학기를 마치고 수강생들은 여행을 떠나거나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무엇을 계획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노크를 반복한다.

▲하얗게 말려 쓰는 슬픔
김선아 지음·서정시학·1만3000원

[김정수의 시톡](15)세상에 선한 폭력은 없습니다

손톱 끝에 별 몇알 싸두었네. 희로애락이 꽃으로 피어나는 어느 하루 있을 것이네. 그날이 언제일지 당신에게 묻지 못했네.

▲옆으로 누운 말들
배윤주 지음·시산맥·1만원

[김정수의 시톡](15)세상에 선한 폭력은 없습니다

바람이 이는 것을 안다. 흔들리는 것도 안다. 내 안의 원형을 쓰다듬으며 바람이 가는 길을 간다.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정현우 지음·달아실·1만원

[김정수의 시톡](15)세상에 선한 폭력은 없습니다

시는 비문증처럼 무시로 어른거렸다. 불치병이다. 병이 깊어지면 어른거리는 것들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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