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 페트로나스, 태국에 PTT가 있다면 인도네시아에는 페르타미나(PT·Pertamina)가 있다. 인도네시아 에너지 및 석유화학 산업에서 업스트림과 다운스트림을 모두 담당하는 페르타미나는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이 매년 매출액 기준으로 선정해 발표하는 글로벌 상위 500대 기업(2022년)에 포함된 유일한 인도네시아 기업이다. 전체 인구가 약 2억8000만명으로 세계 4위, GDP 규모로 아세안 1위, 글로벌 16위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에서 ‘포춘 글로벌 500’ 순위에 포함된 기업이 1개뿐이라는 사실은 의외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업으로 페르타미나를 먼저 떠올리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개의 국영석유회사 1968년 통합
인도네시아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석유개발이 시작됐다. 이후 국가경제 성장에서 천연자원의 중요성이 각인되면서 법률로 국가만이 사업을 하도록 제한했고, 1961년 대통령령으로 3개의 국영석유회사를 설립했다. 국유화한 석유 자원을 생산하려는 외국기업들은 반드시 이 세 기업과 개발계약을 맺도록 조치했고, 이때 세계 최초로 사용한 방식이 바로 생산물 분배계약(Production Sharing Agreement)이다. 이 계약은 투자자가 자원개발을 위한 탐사·개발·생산·판매와 관련된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자원을 생산하고, 자원 생산물에서 투입된 모든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생산물, 즉 이익생산물(profit production)을 국가와 투자자가 정한 분배 비율로 나누는 계약형태다. 이런 계약 방식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용된 이후 주로 달러가 부족하지만,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외국자본의 투자와 협력 형태는 유지됐지만, 수하르토 대통령의 등장 이후 1968년 3개의 국영석유회사 페르타미나(국영 석유 및 가스광업회사)로 통합됐다.
페르타미나는 석유 트레이딩과 아룬 가스전 개발 등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대규모 자본과 시장 확보를 위해 외국기업과 22개의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석유 부문은 이외에도 통신과 의료, 비료 등 비관련 다각화를 추진하며 회사의 규모를 급격히 키워나갔다. 페르타미나의 무리한 확장전략은 1970년대 2차례 석유위기를 겪으며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당시 100억달러가 넘는 부채를 지고 있던 페르타미나를 살리기 위해 정부는 구조조정과 함께 외국기업 투자유치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유동성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난 페르타미나는 국내외 시장의 균형을 맞추는 새로운 전략을 내세웠다. 먼저 자국 내 3개의 정유공장을 증설·확충하면서 내수시장의 수요에 대응했고, 천연가스 개발과 플랜트에 투자해 수출을 늘리고 해외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전략은 주효했다. 국내시장은 안정을 찾았고, 해외시장에서 페르타미나의 존재감도 커졌다. 하지만 외국투자에 의존하는 자원개발 업스트림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원자잿값이 요동칠 때마다 회사의 매출과 순이익도 크게 달라지는 리스크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원자재 시장 노출 위험을 줄이면서 이익률을 높이려면 석유화학제품 생산 등 다운스트림 분야를 강화해야 했다. 2003년 페르타미나는 국영기업에서 일반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정유시설에서 석유화학 제품생산에 이르는 통합 플랜트를 구축했다. 원유부터 윤활유까지 상품 트레이딩과 판매망 구축, 수송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해가면서 각 영역을 사업부가 아닌 자회사에 맡기는 구조를 구축했다. 페르타미나는 자체 사업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이들 자회사를 관할하는 지주회사의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2017년 설립된 페르타미나 인터내셔널 쉬핑(Pertamina International Shipping)은 대형 탱커 운영을 맡은 자회사다. 페르타미나의 원자재 및 제품 운송에 사용하는 선박만 해도 130척이 넘는다. 물론 페르타미나 인터내셔널 쉬핑이 모회사의 일감만 노리는 것은 아니다. 아세안 역내 에너지 기업 중 자체 운송 부문을 보유하지 않은 회사가 많기 때문에 충분한 시장 수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재생에너지·EV 배터리 공격적 투자
월드 클래스 석유회사를 목표로 삼았던 페르타미나는 2011년 월드 클래스 에너지기업이 되겠다고 비전을 바꿨다. 석유에서 에너지로 더 넓은 시장에서 한단계 도약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ESG가 시장의 중요한 기준으로 등장하면서 페르타미나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생산 비중을 17%로 높인다는 목표를 천명했다. 현재 석유와 가스 비중이 80% 이상이지만 재생에너지 부문에 7200만달러를 투자해 수소와 풍력발전, 지열발전 부문을 추가할 예정이다. 페르타미나 발표에 따르면 이 투자금액은 2022~2026년 예상 총매출액의 14%에 해당한다고 하니 기업의 사활을 걸었다고도 볼 수 있다. 지난 3월 일본의 미쓰비시 상사, 국영 비료회사 푸푸크 인도네시아(Pupuk Indonesia)와 함께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그린수소와 그린암모니아 제조에 협력하기로 합의한 것도 에너지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페르타미나의 또 다른 도전은 전기차(EV) 배터리 사업 진출이다. 전기차 배터리 밸류체인에서 페르타미나는 전구체, 음극, 배터리 셀, 배터리 팩, 재활용 등 4개 단계에 참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인도네시아는 배터리 필수소재인 니켈 매장량이 세계 최대다. 이미 중국 회사 CATL과 계약을 맺은 상태이며, LG에너지솔루션과도 컨소시엄을 통해 손을 잡을 예정이다.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 그리고 페르타미나로 이어지는 전기차 밸류체인이 얼마만큼의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에 국내기업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최대 에너지기업의 미래도 함께 달려 있다.
유가 고공행진과 기저효과로 2021년 순이익이 95%가 증가하면서 향상된 실적을 거뒀지만, 페르타미나의 오늘이 그저 평화롭지만은 않다. 인도네시아는 산유국이지만 국내 소비량이 많아서 석유와 가스 순수입국인데다 에너지 보조금도 지급한다. 최근 고유가의 장기화 여파로 물가상승, 경상수지 적자 확대, 에너지 보조금 고갈 위기가 닥쳤다. 전 세계가 에너지 위기에 직면해 전환점에 서 있는 지금 페르타미나는 목표대로 ‘월드클래스 에너지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7위에 오른 페르타미나의 대표 니케 위드야와티의 한마디 한마디에 인도네시아 에너지의 미래가 달려 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고영경 선웨이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