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시니코프의 회한
「AK-47」에서 <로드 오브 워>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무기는 무엇일까? 기네스북에는 AK-47이라는 이름이 올라와 있다. ‘칼라시니코프 오토매틱 라이플’의 줄임말이다. 공식적인 생산량만 1억정이 넘고, 불법복제까지 합산하면 2억정은 기본이라는 이 돌격소총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무기로 알려져 있다. 국제정세와 군사문제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 총의 설계자는 바로 러시아의 미하일 칼라시니코프(1919~2013)로, 그의 장례식에 푸틴이 참석할 정도로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던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전차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후송되던 중 독일군의 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졌는데, 당시 독일군의 우수한 기관단총에 충격을 받아 애국심의 발로로 전선의 병사들에게 더 뛰어난 총을 쥐여주겠다는 일념으로 AK소총을 개발하는 데 이른다.
그는 평생 자신이 만든 총의 성능과 평판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AK 계열 총기는 ‘진정한 대량살상무기’가 돼버렸다. 값싸고 간편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작동하는 이 이상적인 살상무기는 전 세계 분쟁지역 어디에서나 애용됐고, 수많은 학살에 동원됐다. 말년의 칼라시니코프는 이 문제를 괴로워했다고 한다. 여러차례 인터뷰에서 자신의 의도와는 어긋나게 자기 발명품이 악용되는 것을 개탄했다. 청년 시절의 그가 AK소총을 완성하는 과정을 담은 <AK-47>에서 조국을 수호하는 무기로 채용된 AK소총을 자랑스럽게 지켜보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니컬러스 케이지가 무기상인으로 열연한 <로드 오브 워>에 칼라시니코프는 등장하지 않지만 무기상인 주인공의 입을 통해 소개되는, 제3세계 분쟁에 불티나게 팔리는 ‘러시아의 최고 수출품’ AK소총 묘사가 일품이다. 처음 의도는 좋았지만 잘못 활용된 대표사례인 셈이다.
정작 칼라시니코프가 만든 걸작은 조국을 수호하는 데에는 제대로 쓸 일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완성됐기 때문이다. 대신 전 세계 분쟁에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 되고 말았다. 나치 독일의 광적인 인종주의에 수천만명의 인명피해를 낸 소련은 그 교훈에 집착해 방어를 위해 가공할 군사력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소련의 강대한 군사력은 서방진영에 연쇄적인 공포를 불러와 동서냉전으로 치닫는다. 상호 불신이 낳은 악순환이다. 소련은 언제든 서방이 나치독일과 손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의심을 놓지 않았고, 이는 전후에도 이어졌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은 그 연장선에 있다.
<화이트 타이거: 최강 전차 군단>의 묵시록 우리로선 쉽게 이해하기 힘든 러시아의 편집증을 이해하기 위해 러시아의 전쟁영화 <화이트 타이거: 최강 전차 군단>
을 소개한다. 제목만 보면 마치 <패튼 대전차 군단> 부류의 화끈한 전쟁영화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체는 오히려 공포영화에 가깝다.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소련과 독일이 일진일퇴를 벌이던 1943년 무렵, 소련군은 아군 전차에서 군인 1명을 구조한다. 그는 전신 화상을 입어 몇 시간 못 버틸 거라는 군의관의 진단이 무색하게 며칠 후 회복하고 전차병으로 복귀한다. 반격에 나선 소련군에게 ‘화이트 타이거’라는 독일 전차 괴담이 퍼진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등장해 소련군을 박살낸다는 의문의 독일 전차를 잡기 위해 상부에선 특수부대를 편성한다. 여기에 그 부상병이 지휘관으로 합류해 화이트 타이거와 일진일퇴를 벌인다. 그는 전차와 대화할 수 있다며 화이트 타이거는 유령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와 동행한 정보장교 페도토프는 그의 말을 반신반의하지만 실제로 기괴한 적 전차의 패턴을 목격한다. 문제는 아군인 부상병도 미심쩍은 게 한둘이 아니다. 결국 양자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나고 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페도토프에게 부상병은 전쟁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을 들려준 뒤 사라져버린다. 그 역시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그 시각에 함락된 베를린에서 히틀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중이다. 히틀러는 상대에게 자신이 특별한 게 아니라 거대한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을 적대시하는 서방의 의지를 나치독일이 대행했을 뿐이라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곧 새로운 전쟁이 준비될 것이라는 숙명론을 피력한다.
<타운 오브 글로리>와 러시아의 속사정 다큐멘터리가 시작되면 초강대국으로 복귀를 꾀하는 강대국의 야망을 투영하듯 제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 승리의 날 군사퍼레이드가 한창이다. 최신예 기갑부대가 선두에서 보는 이들을 위압한다. 화면이 바뀌면 지난 전쟁의 격전지, 러시아와 벨라루스 국경 마을을 비춘다. 마을은 거대한 병영을 연상케 한다. 이곳에선 1년 내내 전쟁과 군대 관련 기념식과 추모행사가 그치지 않는다. 주민들은 군복을 입고 일상생활을 하는데다 유치원부터 안보교육이 진행된다. 행사 때마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과거 역사를 상기시키며 적들이 지금도 조국을 노린다고 열을 올린다. 그 ‘적’은 미국과 서유럽, 나토, 테러집단 그리고 외국의 사주를 받아 국론을 분열시키는 시민단체들이다.
마을에는 군국주의가 군림하지만, 그 장엄한 추도와 묵념에도 점점 쇠락하는 중이다. 한때 번창하던 공장지대는 이제 연금에 의지하며 술에 찌든 노인만 남았다. 젊은 세대는 기회를 찾아 대도시로 빠져나간다. 영화에는 2명의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마샤란 이름의 중3 소녀는 소련군복을 착용하고 공연이나 오디션에 참가한다. 그는 애국적 내용의 시집을 내는 등 마을의 유명인사다. 은퇴한 중년 남자 세르게이는 마을 주변 과거 격전지를 돌며 수습되지 않은 전사자 시신을 발굴해 매장한다. 그의 동선에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참전용사나 자식을 체첸 전쟁에서 잃은 이들이 가득하다. 마샤는 애국적 군사단체에 가입해 무기 조작을 배우지만 정작 그의 가족 중 참전용사는 없다. 전직 군인인 어머니가 딸에게 주입식 교육을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열기와 다르게 소녀는 점점 자신감을 잃고 침묵에 빠진다. 소련 시절의 껍데기뿐인 영광에 기대어 현실의 빈곤과 쇠퇴를 잊고픈 시골 주민들의 초상은 현재 러시아인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좋은 예시다. 작은 마을의 풍경화 같은 이 영화는 푸틴의 러시아가 처한 신경쇠약 징후를 르포르타주처럼 담아낸다.
러시아의 민주화·안정이 유일한 대안 전쟁은 어느덧 200일을 넘겼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이제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9월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전세가 밀리면 러시아가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는 불안도 깊어만 간다. 결국 러시아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이 전쟁과 향후 세계정세가 요동칠 것이다. 문제는 작금의 전쟁이 어떻게 끝나든 푸틴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주의 독재체제가 근본적으로 혁파되고 러시아가 민주화(와 동시에 안정)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그리고 소련 붕괴 후 러시아가 품었던 서방에 대한 원한이 더 큰 전쟁을 불러온 역사를 반복할지 모를 일이다. 물론 전쟁터의 우크라이나 국민과 기아에 시달리는 제3세계인들의 보편적 인권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지만, 이밖에도 영구적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난제가 한둘이 아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