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은 한국인의 소울푸드 중 하나로 꼽힌다. 언젠가 비건이 되겠다는, 사실상 공염불에 가까운 꿈이 있는 나 또한 사람들과 어울려 어쩌다 치맥을 하는 편이다. 이론과 현실의 이러한 괴리에서 분열한 나는 “밀집감금으로 미친 닭을 살해해 털을 뽑고, 사체를 냉동고에 은닉했다가 그것을 펄펄 끓는 기름에 넣어 사후에 한 번 더 욕보인 다음 추가로 사체에 고춧가루 고문 같은 걸 한 다음에 먹는다”고 입맛 떨어지는 자학 반성문을 읊으며 치킨을 먹는다.
기술화석
그린피스가 하는 ‘건강한 먹거리 캠페인’에서 제시하는 몇가지 숫자가 있는데, 그중 ‘26%’는 지구 전체 면적에서 현재 가축 방목을 위해 사용되는 땅의 비중이다. 80%에는 “2020년 브라질 아마존에서 일어난 삼림 벌채 중 80%가 소 목축을 위해 발생한 벌목으로 추정됩니다”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3.2kg=1kg’. 닭고기 1kg을 생산하는 데 드는 사료의 무게다. 14.5%는, 축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비중. 연구에 따라 축산업의 온실가스 비중은 50%를 넘기도 한다. 터무니없는 가정이지만 세계인이 비건이 되면 온실가스 문제를 해결할 획기적 돌파구가 열린다.
현재의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는 46억년 지구 역사에서 처음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특정 생명종에 의해 초래됐기에 우리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인류세’라는 말을 쓴다.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는 인류를 뜻하는 ‘anthropos’와 시대를 뜻하는 ‘cene’의 합성어다. 위기, 혹은 재앙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현시기를 정의하는 용어로 인기가 있다.
1995년 오존층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폴 크뤼천이 2000년에 처음 인류세란 용어를 제안했다. ‘신생대 제4기 충적세(沖積世)’라는 지질시대 최후의 시기이자 현재의 시기에 더해 크뤼천은 인류세라는 지질시대를 새롭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4년 8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로사이언스 포럼에서 각 분야 과학자들이 인류세란 용어 도입을 지지하면서도 이것이 지질학 이론이냐를 두고는 반론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2016년 케이프타운 세계지질학대회는 “인류세를 지질학 시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단 ‘인류세 워킹그룹’의 검토를 받아들인 이 결론은 권고사항이다.
과학계의 움직임과 별개로 이제 인류세는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용어로 자리 잡은 듯하다. 정색할 필요가 없는 게 인류세는 과학보다는 정치에 기댄 용어다. 과학자 사이먼 루이스가 2009년 가디언 기고문에서 “인류가 지구라는 통합 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고 말했듯, 인류세는 정치적 주장이다. 지구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라는 종의 자기반성과 나아가 규탄을 담은.
만일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살짝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수백만년, 수천만년 세월이 흐른 뒤에 인류세의 표지가 무엇이 될까. 닭뼈다.
인류는 1인당 연간 평균 10마리에 가까운 닭을 소비한다. 한국인의 연간 닭 소비량은 그 2배다. 현재의 식생활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수백년에 걸쳐 인간이 먹고 버린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등의 뼈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 인류의 역사가 잊히고 화석만으로 우리 시대를 추정한다면 이 시대의 지배종은 인간이 아니라 닭으로 추정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하고 나니 꼭 웃기는 얘기인 것 같지 않다.
닭뼈 말고 출토될 특이한 화석으론 플라스틱, 알루미늄, 콘크리트 등이 예상되며 2016년 케이프타운 세계지질학대회에서 ‘인류세 워킹그룹’ 의장을 맡은 얀 잘라시에비치 영국 레스터대학 교수는 인류에 의해 창조된 이런 물질의 화석을 ‘기술화석(technofossil)’이라고 정의했다. 먼 미래에 플라스틱 화석은 닭뼈 화석과 함께 우리 시대를 지질학적으로 정의할 대표적 ‘기술화석’이다. 인류가 자조적으로 또 자학적으로 부여한 인류세란 용어가 전해지려면 인류가 ‘기술화석’이 발굴될 때까지 생존해야 하는데, 기후위기를 고려하지 않아도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남을 것 같지 않기에 우리는 인류라는 정체성 정의보다는 인류의 부산물로 정의되지 않을까.
좋은 인류세?
이 정도로 많은 닭을 인간이 먹기 위해선 공장식 양계가 전제된다. 공장식 양계를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자본주의 시스템, 그것도 글로벌하게 작동하는 자본주의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할 때 인류세에는 자본주의 생산과 소비, 문화와 이념 등 현 인류의 총괄적 삶과 생존의 체계가 확고하게 반영됐다. 세계생태학연구네트워크(WERN) 조정관이자 미국 빙엄턴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제이슨 W. 무어는 “인류세라는 개념이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의 책임을 인류 전체로 돌린 부르주아적인 구습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지 우려가 크다”라는 시각에서 인류세 대신 ‘자본세’라는 명명법을 제안한다.
인류세에 자학적인 뉘앙스가 담긴 것이 사실이기에 ‘자본세’는 분명 많은 이의 죄책감을 덜어준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 시대 기후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한 용어이기도 하다. 한데 ‘자본세’는 전면적인 정치적 명명법이라 그런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에든버러대학에서 2013년 열린 기포드 강연에서 과학기술학자 브루노 라투르는 “인류세가 근대와 근대성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가장 적절한 철학적·종교적 그리고 인류학적 개념이 될 것이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혀 인류세의 범위를 확장했다.
자학이 포함된 반성의 용어인 인류세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지구적 합의가 되고, 나아가 활용 범위가 넓어지는 건 양날의 칼이다. 자기반성을 도외시하고 자기파괴의 부정적인 면만을 지적하며 ‘좋은 인류세’라는 전래의 근대성 해법을 들고나오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믿는 극단적인 세력을 빼고도, 과학기술 발전과 인류의 진보로 현재 인류가 처한 위기를 간단히 혹은 어렵지만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에코모더니스트 진영이 대표적이다. ‘좋은 인류세’란 모순어법을 굳이 감수하며 기후위기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지 않지만, 근대 이래 인류가 그랬듯 인간은 이 위기 또한 극복하여 운명과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장담한다. 비록 형용모순이라 할지라도 ‘좋은 인류세’라는 게 있으면 좋긴 하겠다.
어쩌면 해답을 찾기에 너무 늦었는지 모르지만, 답을 찾으려면 일단 문제를 똑바로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에코모더니스트 같은 이들은 문제는 잘 들여다보지 않고 답을 먼저 얘기하곤 한다. <헤어질 결심>에 기대면 인류는 충분히 나빴고, 문제는 절대 만만하지 않다.
<안치용 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