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내 시는 불가능한 꿈만 꾸는 것일지도”

김정수 시인
2022.08.08

정재학 시인의 신간시집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불은 뜨겁고, 뱀은 징그럽습니다. 불에 손을 대면 화상을 입고, 뱀을 만지면 물리겠지요. 불이 뜨겁고 뱀이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아이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만지려 할 것입니다. ‘호기심 천국’인 어린아이에게 불이나 뱀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미지의 존재니까요. 태어나 처음 접해보는 새롭고도 신기한 것이니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발동하는 건 당연하지만 리스크가 따르겠지요. 그런 호기심이 없었다면 아이의 지적 성장도 멈추고, 인류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정재학 시인(오른쪽)과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표지 / 문학동네

정재학 시인(오른쪽)과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표지 / 문학동네

“글자는 정말 멋진 뱀과 지렁이들이구나”

10년 전, 시인과 시인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엄마인 김향지 시인은 등단 8년 만인 지난해에 첫 시집 <얼굴이 얼굴을 켜는 음악>(문학동네)을 냈고, 아빠인 정재학 시인은 세 번째 시집 이후 8년 만에 네 번째 시집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문학동네)를 냈습니다. 호기심과 호기심이 만났으니, 아이의 호기심은 굉장하겠지요. 아이의 관심은 “매미에서 팽이로, 장미에서 공룡으로, 공룡에서 용으로”(‘그 공룡에게 산타의 선물을!’) 빠르게 옮겨갔습니다. 이제 막 한글에 흥미를 느낀 아들은 시인인 아빠에게 “숨쉬는 글자”(이하 ‘글자의 생’)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글자가 숨을 쉬고 있다는 재미있는 생각, 역시 시인의 아들답습니다. 시인은 아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한글 자음과 모음은 다른 글자를 만나기 위해 항상 숨을 쉬는데, 절대 죽지 않는다고요. 아들이 또 묻습니다. “영원히?” “글자의 힘에 의지하는 것들만 그 글자 속에 숨어서 영원히 살 수 있어.” 여기서 질문을 멈추면 시인의 아들이 아니겠지요.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아마 시인은 잠시 생각했겠지요. 시는 “우리를 꿈꾸게 하는 글자들”인데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하게 해준다고요.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과 사물을 만날 수 있고, 여러 놀이도 할 수 있다고요. 글자는 달팽이 속, 매미 날개, 기차 소리, 미끄럼틀 속에도 숨어 있는데 “시인은 그걸 찾아내는” 사람이라 덧붙입니다. 그것들을 좋아하고 “마음으로 상상”하면 그 소리가 진짜 들리고, “읽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떠오르는데 그 모습은 “꿈틀꿈틀 움직”인다면서요. 아들이 호기심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진짜야? 글자들은 정말 멋진 뱀과 지렁이들이구나!” 아빠와 곁에서 듣고 있던 엄마가 마주보고 웃었겠지요.

유치원에서 백와달팽이를 분양받은 다섯 살 아들은 이름을 ‘잠자리’라 짓고 매일 “얼마나 컸는지 관찰”(이하 ‘달팽이 잠자리 물고기’)하다가 이름을 ‘물고기’로 바꿉니다. 시인은 취해 늦게 돌아온 밤에 “잠자리야, 내 시는 불가능한 꿈만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네 집처럼 나도 쉴 곳”이 필요하다고 하소연합니다. 시집 1부에는 공룡에 관심이 많은 여섯 살, 캔버스와 바이올린을 사달라는 일곱 살, 꽃들은 나무들이 힘들게 응가한 것이라 우기는 여덟 살, 아빠가 듣는 노래 제목을 묻는 열 살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들의 성장사가 녹아 있지요. 언어를 익혀가는 아들의 세계 인식을 통해 언어의 기저에 존재하는 미학을 발견해낸다고나 할까요.

‘슬픔저금통’ 같았던 아버지의 주먹

아홉 살은 시 ‘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2’에 등장합니다. 시인의 아들이 아닌 시인의 아홉 살이죠. 삼척 해변에 서 있다가 갑자기 센 파도에 휩쓸리는 순간 누군가 오른손을 꽉 잡았는데, 그게 아버지였다네요.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나의 큰 산”이 됐는데 “너무 큰 산”이라 벗어나기 어려웠다고 고백합니다. 아버지라는 큰 산에서 “호수로 고여 쉬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는 돌봐야 할 “작은 화분”이 돼 있었다네요. 아홉 살의 나를 잡아줬듯이, 모래처럼 쓸려가는 늙은 아버지의 야윈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보는 것은 슬픔이겠지요.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모습은 시인 혼자 보았다고 합니다. 병원 투명한 유리막 너머에서 인공호흡기를 낀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내가 힘내라고 주먹을 불끈 들었을 때/ 아버지도 천천히 함께 주먹을 들었다”(이하 ‘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3’)고 합니다. 그 주먹이 “슬픔저금통” 같았다네요, 묻어버리고 찾고 싶지 않은. 시인은 그 순간을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아직도 말을 못 하고 있다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이 지난 지금 이제 “슬픔저금통을 쏟아버리”고 싶다는 시인은 “아버지가 저를 시인으로 키우신 것”을 알고 있다며, “시 몇 편 쓰고자 저는 아버지를 선택”했다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시인은 “1982년 아홉 살 봉천동 골목”(‘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1’)의 ‘정지한 시간’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홉 살 아들에게서 자신의 아홉 살을 떠올리면서요.

1996년 ‘작가세계’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정재학은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모음들이 쏟아진다> 등의 시집에서 환상적 상상을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모더니스트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이번 시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아이의 성장사와 함께한 시편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삶이 숨쉬는 시간과 공간에서 세계와 불화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또한 사물과 언어에서 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추출해 보다 깊은 시의 영역으로 진입하려 합니다. 시인은 “열세 살 때부터 시를 썼고”(이하 ‘반시(反詩)’) 스물세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등단해 벌써 “햇수로 이십오 년”이 됐습니다. 그런 시인이 “난 시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고 시를 써왔”다고 합니다. “시 쓰는 법을 매번 까먹”(‘시인의 말’)기까지 하고요.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시가 탄생할 것이고, 어차피 평생 쓸 것이니까요.

▲시인의 말

[김정수의 시톡](12)“내 시는 불가능한 꿈만 꾸는 것일지도”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
정연희 지음·천년의시작·1만원
나무의 회청색 얼룩들
굽이치는 시간을
견뎌 온 그의 길을
들여다본다.

[김정수의 시톡](12)“내 시는 불가능한 꿈만 꾸는 것일지도”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
진란 지음·문학의전당·1만원
눈을 뜨면 가끔 내가
잠들었던 곳이 아닌
사막에서 닳아버린
불온한 여우를 만난다.

[김정수의 시톡](12)“내 시는 불가능한 꿈만 꾸는 것일지도”

황학산에 들다
김응혜 지음·리토피아·9000원
웃자란 초록이 같이
성급하게 내디딘
작은 발자국
조심스레 찍어본다.

[김정수의 시톡](12)“내 시는 불가능한 꿈만 꾸는 것일지도”

어쩌자고 나는 자꾸자꾸
손준호 지음·시산맥·1만원
그간 말이 길었다.
언어의 군살을 좀 뺐다.
딸 채현이가 찜해둔
손바닥 시편으로 묶었다.

[김정수의 시톡](12)“내 시는 불가능한 꿈만 꾸는 것일지도”

노랑으로 미끄러져 보라
김민채 지음·상상인·1만원
오늘도 나는,
나에게 건너가는 중이다.
하루가 너무 짧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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