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한용현 법률사무소 해내 변호사
2022.07.11

정부는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면 장년 근로자로 계속 일할 수 있고, 청년의 일자리도 늘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호봉제를 실시하는 기업이 많은 한국의 현실에서 고임금 근로자에게 퇴직의 유인을 주고, 그래서 생겨난 자리에 청년을 고용한다는 정책은 그럴듯하기도 합니다.

지난 6월 8일 서울 용산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주최로 ‘임금피크제 지침 폐기 및 노정교섭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 연합뉴스

지난 6월 8일 서울 용산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주최로 ‘임금피크제 지침 폐기 및 노정교섭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 연합뉴스

임금피크제와 연봉계약 중 우선은? A는 골프장·스키장을 운영하는 회사(문경레저타운)에 2003년부터 2016년까지 14년간 근무한 근로자입니다. A는 회사와 2014년 3월 7090만원에 연봉계약을 했습니다. 회사는 노조의 동의를 받아 ‘임금피크제 운용세칙’(취업규칙)을 제정·공고했습니다. 정년 2년 미만자에 기준연봉(임금피크제 적용 직전 연봉)의 60%, 정년 1년 미만자는 기준연봉의 40%였습니다.

A는 회사에 임금피크제의 적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회사가 삭감된 임금을 지급하자, A는 삭감되지 않은 임금을 지급하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1심과 2심 법원은 모두 회사 편이었습니다. 누구나 회사의 최종적인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3심인 대법원은 2019년, 취업규칙보다 개별 근로자의 근로계약이 근로자에게 ‘유리한 경우’에는 근로계약이 취업규칙에 우선해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즉 불리한 취업규칙?유리한 근로계약). 이 사건의 경우 근로자의 근로계약에서 정한 연봉 7090만원이 취업규칙에서 정한 60%보다 유리하므로 근로계약에 따른 연봉이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대법원 2019. 11. 14. 선고 2018다200709 판결).

임금피크제 도입을 권장한 정부도, 제도를 믿고 도입을 한 회사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회사들은 이 판결을 거울삼아 (i)임금피크제를 도입할 때 취업규칙만 변경할 것이 아니라 개별 근로계약을 잘할 것, (ii)단체협약에도 반영할 것, (iii)임금피크제 외에 다른 조건은 유리하게 변경해 취업규칙이 전체적으로 불이익하지 않도록 할 것 등 보완책 마련에 분주했습니다. 대법원은 이례적인 판결을 하면서도 ‘전원합의체’ 판결(13인)을 하지 않고 소부(4인) 판결을 해 이 판결이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비판도 일었습니다.

젊음은 상이 아니고 늙음도 죄가 아니다 2021년에는 법원이 “고령자고용법 위반”과 “선량한 풍속 위반”을 임금피크제도 무효사유로 추가했습니다.

학습지 회사 대교는 2009년, 직급을 6단계로 나눠 일정 기간이나 횟수 경과 시까지 승급하지 못한 경우 승급 기회 및 임원 임용기회를 제한하는 ‘직급정년제’를 만들었습니다. 직무등급별로 만 50세에서 만 57세까지 정년 해당 기간을 달리했고, 승급기회 역시 다르게 정했습니다. 또 직급에 따라 임금피크 적용연령을 달리해 1등급은 임금피크 최초 적용 연령을 만 50세로, 4등급은 만 44세로 적용했습니다. 2010년에는 임금을 순차로 50%까지 삭감하는 등 임금삭감률을 높인 ‘2차 임금피크제’ 등의 인사제도 개선을 내용으로 하는 취업규칙을 개정했습니다(이례적으로 40대부터 임피제를 도입했습니다).

1992년에 만든 ‘고령자고용법’이라는 법이 있습니다. 원래는 고령자고용을 촉진하자는 취지의 법(고령자고용촉진법)이었는데, 고용에서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는 관행에 대책 마련이 필요했고, 2009년부터는 연령차별행위를 금지하는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로 바뀌었습니다. 법은 ①근로자의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정하여야 한다, ②근로자의 정년을 60세 미만으로 정한 경우에 정년은 60세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제19조). 그러면서 정년연장에 따른 임금체계 개편(임금피크제 포함)을 또 규정하고 있습니다(제19조의2).

법에 임금피크제 근거가 있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업주가 동일한 사업 내의 동일 가치 노동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 또한 법입니다(지난번에 살펴본 남녀고용평등법에 있습니다). 법원은 2021년, 대교에서 40대 중반부터 최대 50%까지 임금을 삭감하도록 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정년을 연장한 것은 ①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로서 고령자고용법 위반이고 ②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민법 제103조)에도 반해 무효라고 보았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21. 9. 8. 선고 2019나2016657 확정판결).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 시인은 “너의 젊음이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 또한 죄로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풍속에 비춰 합리적이지도 않거니와 현 추세로 볼 때 ‘늙음’의 기준을 아무리 낮춰도 50대는커녕 40대가 되기는 어렵다는 판결로 보입니다.

섭섭하게 하면 무효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역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습니다. 직원들의 정년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 이전에도 61세였고, 임금피크제의 도입에 따라 정년을 연장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정년이 변동되지 않은 채 임금피크제를 시행한 경우는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임금피크제 도입과 함께 정년이 연장된 경우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라고 합니다.

대법원은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가 무효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1)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 (2)근로자들이 입는 불이익의 정도, (3)임금 삭감에 대한 대상 조치(△직무재배치 등 업무 경감 △근로시간 단축 △재취업을 위한 교육 시행)의 도입 여부 및 그 적정성, (4)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임금피크제 도입의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여부가 그것입니다. ‘목적이 부당하고, 보상이 섭섭하면 무효일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대법원 2022. 5. 26. 선고 2017다292343 판결).

대법원은 (i)회사의 주장으로도 51~55세 직원들의 실적 달성률이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정당성 부정), (ii)임금피크제로 인해 직원은 임금이 일시에 대폭 하락하는 불이익을 입었고, 업무감축 등 적정한 조치가 강구되지 않은 점(대상 조치 없음), (iii)임금피크제를 전후해 원고에게 부여된 목표 수준이나 업무의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임금피크제 도입 전후 업무 내용, 목표 수준의 차이 없음)도 컸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임금피크제가 무효가 되는 건 아닙니다. 최근 법원은 KT 사건에서 (i)임금피크제 도입 당시 KT의 인력 부족, 경영 사정(영업손실 7194억원) 등을 보면, KT는 정년 연장에 대응해 임금피크제를 시행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고 인정되고, (ii)정년 연장을 통해 결과적으로 임금 침해적 측면에서는 더 많은 임금이 지급되며, (iii)정년 연장 자체가 임금삭감에 대응하는 가장 중요한 보상이라 보았습니다. 일부 절차상 불법이 있지만, 임금피크제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서울중앙지법 2022. 6. 16. 선고 2019가합592028 판결). 인천환경공단도, 국민건강보험공단 사건에서도 법원은 임피제를 유효하다고 보았습니다.

특정 연령 이상의 근로자 집단에만 임금 차등을 두지 말고, 어쩔 수 없이 차등한다면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보상조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들입니다. (정년이 다가온 근로자를 노인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고령자를 위한 나라는 있습니다.

<한용현 법률사무소 해내 변호사>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