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500년 전 무덤에 함께 묻힌 개의 정체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2.06.06

경남 창녕 화왕산(758m)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교동·송현동 고분군에는 300여기의 무덤이 집중돼 있습니다.

가야연맹체 중 비화가야 지도자의 후예가 묻힌 고분군이죠. 이곳 창녕은 물론 고령, 함안, 김해, 성주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무단발굴과 도굴의 무대였습니다. 일제가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임나일본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던 거죠.

경북 경주 탑동 유적에서 확인된 최장신 인골의 양쪽 넓적다리 뼈 위에서 한마리분의 개뼈가 확인됐다. 해체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한마리었다. / 문화재청 제공

경북 경주 탑동 유적에서 확인된 최장신 인골의 양쪽 넓적다리 뼈 위에서 한마리분의 개뼈가 확인됐다. 해체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한마리었다. / 문화재청 제공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369~562년 사이 야마토(大和) 정권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세워 200여년간 지배했다는 학설입니다.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돼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매일신보> 1915년 7월 24일)

하지만 그들은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지 못합니다. 가야지역 발굴에 나선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1874~1946) 도쿄대(東京大) 교수는 “막상 임나일본부라고 해도 연구해보면 모두 조선풍이었다”면서 “임나일본부의 자취는 이미 사라져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임나일본부의 흔적이 나올 리 없죠.

그렇게 용도폐기된 가야고분군은 방치돼 도굴꾼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빵조각에 고무대야, 양동이까지… 2016년 교동 고분군의 맨 위쪽에 자리 잡고 있던 대형고분(지름 27.5m·39호분)을 발굴한 조사단(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은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깨끗하게 치워진 무덤방 안에 도굴에 썼던 고무대야와 양동이까지 버젓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무덤 안에 ‘주식회사 기린’, ‘삼립빵’, ‘권장가격 300원’이라는 글자를 선명하게 새긴 빵봉지까지 보였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고무대야와 양동이까지 들고 유물을 털어간 도굴범들이 무덤방에서 유유히 빵까지 먹었다는 얘기죠.

제가 취재해보니 삼립식품에서 1981년 ㈜기린으로 바뀌었고, 1980년 한해만 ‘삼립빵’이란 상표를 같이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도굴은 80년대 초·중반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3년 뒤인 2019년 11월 20일이었습니다. 39호분을 발굴하던 조사단이 이 고분과 연접해 조성된 또 다른 무덤을 찾아냈습니다. 39호분의 바로 밑에서 노출된 고분의 무덤방은 길이 2m가량의 돌 7개로 뚜껑을 덮었고, 돌 틈은 점질토로 밀봉돼 있었습니다. 도굴의 흔적이 없었다는 얘깁니다. 위에 조성된 39호분이 ‘온몸으로 덮어준’ 덕분에 63호분(지름 20m)은 도굴의 화를 모면했습니다. 8일 후인 11월 28일 대형크레인으로 3.8t, 2.8t이나 되는 63호분의 덮개돌을 들어내는 언론 공개회가 열렸습니다.

신라식 금동관을 쓴 교동마님 본격 발굴 결과는 ‘과연’이었습니다. 주인공 머리 쪽에서 높이가 21.5㎝에 이르는 금동관이 확인됐습니다. ‘출(出)’ 자형의 전형적인 신라관이었습니다. 이어 관에 늘어뜨린 금동드리개 및 금동 막대장식이, 귀 쪽에서는 굵은고리 귀고리 1쌍이 차례로 보였습니다. 목과 가슴 부근에서는 유리구슬 목걸이가, 손 쪽에서는 은반지가 나타났습니다. 장식 달린 허리띠에는 은장도 2점이 달려 있었습니다. 피장자의 몸을 치장했던 장신구 일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겁니다.

5세기 중반에 조성된 이 고분의 주인공은 키 155㎝인 여성으로 추정됐습니다.

2006년 이 고분과 인접한 송현동에서 확인된 인골을 복원한 뒤 그 이름을 ‘송현이’로 붙인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동에 묻힌 63호분의 피장자는 ‘교동마님’으로 명명하면 되겠네요. 또 무덤 안팎에 최소 5명의 순장자를 묻은 흔적이 보였습니다.

무덤 안 순장공간에 2명, 그리고 무덤 밖 흙을 쌓은 봉토 안에서 석곽 2기와 옹관 1기가 나타났습니다. 무덤 내 2명과 봉토 속 3명 등 최소한 5명을 순장했을 가능성이 짙은 거죠.

아래와 위에 연접된 63호분(지름 20m)과 39호분(27.5m)의 주인공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두 무덤의 연대차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고 합니다. 63호분을 먼저 조성하고, 그 위에 39호분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답니다. 63호분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처참하게 도굴된 39호분은 남성의 무덤일 가능성이 짙답니다.

경남 창녕 교동 고분군의 위쪽에 조성된 39호분과 39호분 바로 밑에 조성된 63호분. 39호분은 일제강점기 이후 도굴의 참상을 겪었지만 39호분이 덮고 있던 63호분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노출되었다. / 김보상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제공

경남 창녕 교동 고분군의 위쪽에 조성된 39호분과 39호분 바로 밑에 조성된 63호분. 39호분은 일제강점기 이후 도굴의 참상을 겪었지만 39호분이 덮고 있던 63호분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노출되었다. / 김보상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제공

그럼 두분은 부부였을 수도 있겠네요. 비화가야 후예로서 창녕 지역을 다스리던 남성 지도자가 먼저 죽은 부인의 머리에 신라 중앙정부가 하사한 금동관을 씌워 명복을 빈 것은 아닐까요.

물론 63호분의 주인공 자체가 이 지역을 다스린 여성 지도자였을 수도 있죠. 어떻든 부부가 맞다면 남편(39호분)이 위에서 덮어준 덕분에 부인(63호분)을 보호한 셈이 됐네요.

전용공간에 묻힌 개 3마리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2020년 12월 15일이었습니다.

무덤의 구조를 정확하기 파악하려 입구 쪽의 벽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매우 특별한 유구가 확인됩니다.

길이 1m가량의 소형 덧널(석곽)이 노출된 건데요. 덧널 안에 3마리분의 동물의 뼈가 보였습니다. 3마리 모두 무덤을 등지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3마리 다 성견이었고, 그중 한마리는 노견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3마리 모두 해체되지 않은 채로 온전하게, 그것도 정연하게 묻혀 있는 게 의미심장했습니다.

이때 조사단의 뇌리에 스치는 번뜩이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위 39호분의 입구 쪽에도 비슷한 크기(길이 1m)의 덧널이 조성돼 있었거든요. 새삼 39호분 입구 쪽에 조성된 덧널 속을 살펴보니 과연 부식한 개의 뼈가 보였습니다.

분석결과 39호와 63호 모두 주인공을 묻고 무덤 입구를 폐쇄하면서 ‘개(犬) 전용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39·63호 고분의 특징은 무덤방 안에 순장자 2~3명을 두고, 무덤 밖 봉토 속에도 덧널과 옹관 등을 조성해 순장자를 묻는 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두 고분의 입구 쪽에 바깥쪽을 바라보고 나란히 누운 채 확인된 개들도 순장견이겠네요.

조사단이 옛 자료를 찾아보니 창녕 교동 7호분과 41호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동물 유체의 매장사례가 확인된 바 있었답니다.

무덤을 지키는 경비견, 수호견 사실 고분에서 동물 뼈가 확인된 예는 많죠. 해체 후 일부를 부장한 동물의 뼈가 대부분이지만, 제사용으로 쓰인 소 등을 통째로 묻는 사례도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가축으로 키웠고, 요즘엔 반려견으로 대접받는 개의 경우는 어떨까요.

제가 본 가장 극적인 예는 1974년 전국시대 중산국(?~기원전 296) 왕릉에서 출토된 개의 유골인데요. 중산국의 개는 당대에 ‘북견(北犬)’으로 알려져 중원에서도 수입했답니다. 확인된 중산국 북견 2마리의 목에는 금은 목걸이가 걸려 있습니다.

<후한서> ‘오환선비열전’은 “오환(烏桓) 사람들은 개가 피장자를 하늘세계로 인도한다고 믿고 개를 붉은색 끈으로 매어 데려와 피장자와 함께 매장한다”고 했습니다. 한반도의 경우는 어떨까요.

청동기 후기~철기시대 유적인 경남 사천 늑도에서 26기 이상의 인골과 함께 28기 이상 개의 뼈가 확인된 예가 있는데요. 이중 순장견이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경북 경산 임당 2호분의 덮개돌 위에서 발견된 개 4마리 역시 순장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 함안 말이산 5-2호분, 의성 대리리 고분, 경산 조영 목곽묘 등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의 매장사례가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런 순장의 예는 대부분 제의를 위해 희생된 제물로 해석됩니다.

경남 창녕 교동 39호분 속에 버려져 있었던 삼립빵 봉지. 1980년대 초반에 마지막 도굴이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경남 창녕 교동 39호분 속에 버려져 있었던 삼립빵 봉지. 1980년대 초반에 마지막 도굴이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 점에서 창녕 교동 39·63호분에서 확인된 순장견은 단순한 부장품이나 제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우선 순장견을 무덤 주인공을 묻고 고분의 입구를 닫은 뒤에 별도의 전용공간(덧널·석곽)에 넣은 게 눈에 띄고요. 또 개를 해체하지 않고 세마리를 온전히 넣었다는 것과 한결같이 바깥을 바라보는 형태였다는 점 등에 착안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볼까요. ‘영화 13년’(357·고국원왕 27)의 묵서명이 있는 안악 3호분의 부엌과 영락 18년(408·광개토대왕 18)에 조성된 덕흥리 벽화고분의 ‘견우와 직녀’ 그림에서도 개가 확인되고요.

송죽리 벽화고분, 각저총, 무용총, 장천 1호분, 개마총 등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무용총에 묘사된 개는 말을 탄 무덤주인을 영혼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답니다.

각저총 널길의 서북벽에 그려진 개의 경우 창녕 교동 39·63호분의 개(犬)와 궤를 같이한다는데요.

그림의 위치가 무덤 입구에서 널방에 이르는 통로인 널길의 서북벽에 있고, 무언가를 지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는 겁니다. 발굴단은 이것을 백제 무령왕릉의 널길에 서 있던 진묘수(鎭墓獸·무덤을 지키는 짐승)와 연결짓는데요.

창녕 교동 39호와 63호 고분의 순장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덤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바깥을 바라보며 사악한 기운을 막고, 무덤 주인공을 지키고 선 진묘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넓적다리 위에 놓인 반려견 2021년 8월 경북 경주 탑동 유적에서도 의미심장한 발굴 성과가 발표됐습니다.

발굴단(한국문화재재단)이 삼국시대 인골 중 최장신에 속하는 175~180㎝의 남성 인골을 찾아낸 겁니다.

이 유골은 5~6세기 삼국시대 무덤 24기와 그 내부에 있던 12기의 인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노출됐는데요. 유골의 출토 사실이 알려지자 세인의 관심은 삼국시대 최장신 남성의 현현에 쏠렸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시대 남성 인골의 평균신장이 165㎝ 정도였거든요. 그런 가운데 기골이 장대한 신라인이 출현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게다가 보존상태까지 훌륭했습니다.

최장신 인골의 확인도 중요했지만, 더 의미심장한 발굴의 양상이 포착됐습니다.

그것은 인골의 양쪽 넓적다리 위에 개의 뼈가 가로질러 놓인 모습이었습니다. 이 개 또한 해체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한마리분이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중소형견으로 판단됐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덤 주인공이 생전에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반려견을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고 묻어준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야연맹체 중 비화가야의 후예들이 묻힌 경남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 이중 화왕산 기슭 가장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교동 39호분 발굴이 2016년부터 시작됐다. 39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27.5m에 달할 정도의 대형분이다. 하지만 발굴결과 도굴구덩이가 뻥뻥 뚫려 있었다.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가야연맹체 중 비화가야의 후예들이 묻힌 경남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 이중 화왕산 기슭 가장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교동 39호분 발굴이 2016년부터 시작됐다. 39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27.5m에 달할 정도의 대형분이다. 하지만 발굴결과 도굴구덩이가 뻥뻥 뚫려 있었다.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주인공의 내세를 지킨 수호신의 의미로 무덤 입구의 별도공간에 묻힌 창녕 교동 39·63호의 개들과는 약간 다르죠.

매장 양상이 어떻든 교동이나 탑동의 개들은 생전에 무덤 주인공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반려견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 죽은 주인의 내세를 지키기 위해(창녕 교동), 혹은 죽은 주인의 반려를 위해(경주 탑동) 묻힌 겁니다.

인권(人權)과 견권(犬權) 경남 창녕, 경북 경주의 무덤을 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습니다. 순장견도 딱합니다. 주인이 죽자 생전에 애지중지한 반려견까지 죽여서 묻었다는 얘기잖습니까. 반려견을 아낀 고인의 뜻을 담아 살아 있는 사람이 잘 키우면 될 일인데요. 아무리 내세를 믿었다 해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까지 묻을 것까지는 없지 않았을까요.

욕심이겠죠. 순장이 고대사회의 보편적인 풍습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른바 ‘견권(犬權)’까지 거론하기는 힘들겠죠. 그게 무리라면 창녕 교동 39호와 63호 고분의 안팎에 묻힌 사람들, 즉 순장자들의 ‘인권’을 거론하고 싶습니다.

주인공의 내세를 위해 생짜로 죽임을 당한 순장자들이 순장견과 같은 반열에서 묻혔지 않습니까.

어떤 명분을 끌어대도 개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얘기지 않습니까. 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죽을 운명에 처한 분들이 과연 순순히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을까요. 아니었겠죠. 사람의 통곡과 개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찔렀을 겁니다.

*이 기사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김보상 학예연구사와 권주영·문정희 연구원,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우하영 한국문화재재단 조사1팀 부팀장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줬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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