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기, 피로 물든 우크라이나
2019년 미국 케이블 방송 HBO에서 공개한 5부작 드라마 <체르노빌>은 제목에서 짐작되듯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재현한다. 사고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소련 정부는 총력으로 인근 주민을 소개(疎開·분산)하지만, 특히 고령자들의 저항이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드라마의 한장면이 상징적이다. 인근 농가에서 혼자 소의 젖을 짜던 할머니와 군인들의 대화다. “총 들고 찾아온 병사가 처음이 아니야. 내가 열두 살 때 혁명이 일어났지. 차르의 병사들, 이어서 볼셰비키들…. 다음에 스탈린이 왔고 기근이 터졌지. ‘홀로도모르’… 다음으로 세계대전. 독일 애들, 러시아 애들, 더 많은 병사, 더 많은 기근, 더 많은 시체. 형제들은 돌아오지 못했어. 하지만 나는 남았고 아직 여기 있다오. 그 모든 것을 겪고서….” 군인은 말없이 소를 총으로 쏴버린다. 망연자실한 할머니는 묵묵히 군인들의 뒤를 따른다. 20세기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단 몇분 만에 요약하는 명장면이다.
블러드랜드 예일대 역사학 교수 티머시 스나이더가 집필한 논픽션 <피에 젖은 땅: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이란 책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사와 관련해 16개 보관소를 샅샅이 뒤져 정리한 이 책은 ‘블러드랜드’, 즉 나치독일과 소련 사이 경계지대에서 죽어간 1400만명의 정치적 학살 피해자를 다룬다. 블러드랜드는 광대한 동유럽 영역을 포괄하지만, 그 핵심지대는 바로 우크라이나다. 스탈린의 대숙청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이어 히틀러의 침략과 홀로코스트가 뒤따랐다. 평범한 인간의 사고로는 상상 불가능한 대학살이 벌어졌다. 피해자 대부분은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전대미문의 참상을 정치적 학살로 규정하고, 그 경과와 원인에 다양한 주석을 달았다. 대체 ‘피에 젖은 땅’ 우크라이나에는 20세기 전반기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대장 부리바>에서 폴란드에 반란을 일으키고 러시아에 귀의한 카자크는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2세 치하에서 자치권을 상실한다. ‘타타르의 위협’에서 벗어난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흑토에서 생산된 밀을 유럽에 수출하며 러시아의 돈줄이 된다. 카자크는 이제 과거의 자유민 집단에서 강대한 러시아 제국의 위력을 상징하는 군사집단으로 거듭난다. 나폴레옹 전쟁을 비롯한 당대 유럽 전장에서 카자크 기병은 명성을 떨쳤지만, 제정에 반대하는 이들에겐 가혹한 탄압의 첨병이기도 했다.
카자크가 20세기 초에 처한 운명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에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비교적 평등했던 우크라이나 카자크 집단에 계층분화가 극심해진다. 카자크의 상층부는 러시아 귀족과 지주로 변신해 부를 축적한다. 반면 하층집단은 농노들과 뒤섞이면서 권리가 하락하고 빈곤상태에 빠진다. 그렇게 자유민의 정체성을 상당 부분 잃어가던 카자크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벌어진 적백내전의 한복판으로 떨어진다. 카자크 상류층은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혁명세력인 ‘백군’에 가담했고, 무산계급으로 전락한 하류층은 혁명에 동참하는 ‘적군’으로 참전한다. 카자크 간의 전쟁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어진다.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은 소련의 대문호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에 잘 담겨 있다. 작가가 돈강 유역의 카자크 마을에서 태어났고, 어머니가 카자크 출신이라 그의 대표작은 카자크의 실상을 정교하게 묘사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소설은 여러차례 영화화됐지만, 특히 1957년, 세르게이 게라시모프가 연출해 4부로 구성한 320분(!)짜리 영화가 유명하다.
가난한 카자크 청년 그레고리가 마을의 유부녀 악시냐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고향을 떠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레고리는 카자크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난다. 그사이 귀족의 유혹에 빠진 악시냐는 그레고리와 헤어져 귀향한다. 혁명이 발생한 러시아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카자크 동포들의 사이도 갈라진다. 희생이 늘어간다. 그레고리는 백군 장교가 돼 악시냐와 재회하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는다. 내전은 적군의 승리로 기울고 그레고리는 고향에 돌아오지만 고발당해 도피한다. 악시냐는 패잔병에게 목숨을 잃는다. 오랜 방황 끝에 그레고리가 어린 아들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레고리의 갈지자 행보는 당시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운명 그 자체다.
홀로도모르 역사상 수많은 기근이 있었지만, 현대에 발생한 ‘인재’로 1932~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 일명 ‘홀로도모르’(Holodo는 ‘기아’, mor는 ‘대규모 죽음’, 즉 기아에 의한 대량학살을 뜻한다)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그 원인과 책임을 두고 논쟁 중인 이 참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적 갈등에도 핵심고리로 작동한다. 폴란드의 거장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연출한 2019년 영화 <미스터 존스>는 홀로도모르의 실상을 서방에 최초로 알린 가레스 존스의 이야기를 담았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럽은 다시 전쟁의 위협에 직면한다. 세계 대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방은 공세적 정책을 취하는 나치독일을 제어하기에 역부족인 상황이다. 당시 영국 총리의 젊은 보좌역 가레스 존스는 혁명 이후 서구와 껄끄러운 상태였지만 대공황을 피해 기록적 경제성장을 이루던 소련과의 동맹을 제안하고 실태 파악을 위해 모스크바로 향한다. 젊은 혈기에 그는 소련의 자금줄인 우크라이나 현지의 암행 취재를 시작한다.
도청과 미행을 돌파해 홀로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가레스 존스는 홀로도모르의 참상을 목격하고 망연자실한다. 비옥한 곡창에서 생산된 곡물은 공업화가 한창이던 도시 노동자의 식량 공급과 산업화를 위한 재원으로 수탈되고 있었다. 흉작의 고통은 고스란히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 전가됐다. 식인(食人)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존스는 퓰리처상 수상자인 뉴욕타임스의 모스크바 지국장, 월터 듀란티에 이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지만, 소련 정부의 입막음에 굴복한 그에게 도움은커녕 방해를 받는다. 기아로 인한 직접 인명피해는 300만, 출산손실까지 합하면 1000만이 넘는 희생자를 낸 이 대재앙은 당시 소련의 집단화계획과 맞물려 현대 우크라이나는 명백한 의도적 ‘학살’로 규정하고 있다(여전히 학계에선 논쟁 중이다).
고립상태에서 대참사를 겪은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체제에 불신과 원한을 품는다. 훗날 히틀러와 나치의 실상을 모른 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을 침략한 독일군대를 ‘해방자’로 환영한다. 우리는 역사책을 통해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 ‘한 인간이 두 번의 세계대전과 내전, 강제이주와 강압적 집단화, 대기근을 불과 30년 동안 몽땅 겪는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한 상상이 우크라이나에선 현실이 됐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뿌리 깊은 불신의 역사는 이렇게 생생한 체험으로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