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로 돌아온 독재자의 아내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2022.04.25

이멜다 마르코스를 기억하는가. 21년간 필리핀을 지배하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로 시민혁명으로 축출된 뒤 해외 도피할 때 못 챙겨간 엄청난 사치품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 ‘이멜다’다. 남편은 1989년 망명지에서 죽었지만 1929년생 이멜다는 90세가 넘었는데도 정정하다.

<이멜다 마르코스: 사랑의 영부인> 포스터 / 왓챠

<이멜다 마르코스: 사랑의 영부인> 포스터 / 왓챠

2022년 5월 9일은 향후 6년간 재임할 필리핀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이다. 현재 압도적 1위로 이멜다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가 선두다. 정·부통령이 서로 다른 정당 소속인 게 가능한 대선에서 부통령선거 상황은 어떨까? 현직 대통령인 ‘스트롱맨’, 권위주의 통치자인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딸이 러닝메이트로 역시 선두다. 30여년 전 쫓겨난 독재자의 아들과 과격한 언행으로 논란 많은 현직 대통령 딸의 동반 집권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우리에게도 이멜다와 마르코스 일가의 부정부패는 상식으로 기억되는데 필리핀에선 집단 기억상실이라도 발생한 걸까. 이 의문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설을 제시하는 영화 한편을 소개한다. OTT 왓챠에서 서비스 중인 <이멜다 마르코스: 사랑의 영부인>(2019)이다.

영화는 이멜다와 마르코스 가문의 행적을 집중 조명한다. 수행원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는 그를 알아본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든다. 비서에게 현금 뭉치를 받아든 이멜다는 아이들에게 돈을 나눠준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필리핀의 빈곤이 슬프다고 말한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일 때는 이렇지 않았다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이어 도착한 병원에서도 과자 사먹으라며 아이들에게 현찰을 뿌린다. 당시 이멜다는 현직 의원 신분, 아들과 딸도 의원과 주지사였다.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은 제작진들도 매한가지지만 감독은 이멜다와 논쟁을 벌이거나 정면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이멜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도록 유도한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멜다는 주장과 변명을 펼친다. 이를 통해 궁금하지만 차마 묻지 못하던 내용까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멜다가 화면에서 사라지면 방금 그가 늘어놓던 주장을 반박하는 여러 인사의 증언이 빈자리를 채운다. 니노이 아키노 전 대통령이나 레니 로브래도 부통령 같은 중량급 인사는 물론 언론인과 활동가, 부정부패자금 환수 특임기관장, 마르코스의 계엄령 치하 박해당한 희생자, 이멜다의 취미로 아프리카에서 공수해온 야생동물 사육을 위해 살던 섬에서 쫓겨난 원주민까지 그들의 증언은 충격으로 넘쳐난다.

과거 독재자 가족이 저지른 부정축재의 고발에 그쳤다면 적당히 흥미로운 영화로 끝났을 테다. 이멜다가 이끄는 마르코스 가문은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고, 다시 정권을 쥘 계획을 차곡차곡 진행하고 있다. 그 어떤 공포영화도 초월하는 아득한 공포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재한 공공서비스는 국민 다수를 빈곤에 내몰아 과거사 진상규명도, SNS 여론조작도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든다. 공화정 말기 로마의 독재자들이 빵과 서커스로 빈민의 표를 훑던 상황 그대로다. 시민혁명 후에도 30년간 근본적 개혁을 이루지 못한 빈국의 현실이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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