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백제의 금동신발은 누가 신었을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2.04.11

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금동신발은 대략 56점(조각 포함)입니다. 그중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금동신발은 딱 2점입니다. 그것이 전북 고창 봉덕리 1호분과 전남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백제산 금동신발인데요.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인 무령왕릉 출토품도 국보나 보물로 대접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지방의 수장 무덤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이 보물로 지정됐을까요.

5세기 최고의 명품 구두인 백제 금동신발 이야기에 빠져보겠습니다.

삼국시대 장례용 명품구두인 금동신발은 지금까지 50여점(조각 포함) 출토됐다. 그러나 그중 국가지정문화재가 된 것은 전북 고창 봉덕리 고분과 전남 나주 다시리 정촌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 등 2켤레 뿐이다.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삼국시대 장례용 명품구두인 금동신발은 지금까지 50여점(조각 포함) 출토됐다. 그러나 그중 국가지정문화재가 된 것은 전북 고창 봉덕리 고분과 전남 나주 다시리 정촌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 등 2켤레 뿐이다.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전문가의 탄성을 자아낸 백제산 금동신발 2009년 9월 고창 봉덕리 고분을 조사하던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구덩식 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 1기에서 금동신발을 찾아냈습니다. 무덤의 조성연대는 450~475년으로 추정됐습니다. 신발의 사이즈는 324(좌)~327(우)㎜였고요.

오른쪽 신발 내부에서 직물과 함께 극히 일부지만 무덤 주인의 뼈가 확인됐습니다. 피장자의 버선발에 금동신발을 신겨서 안장한 겁니다. 장례용이었던 거죠.

금동신발은 바닥판과 양 옆판, 그리고 2㎝가량의 목깃을 포함해 4장의 금속판을 접어 못으로 고정해 제작했습니다.

양 옆판과 바닥판에는 다양한 문양을 배치했습니다. 양쪽 옆면 아래위는 하트 모양의 불꽃무늬(혹은 인동무늬)를 표현했고요.

가운데 조성한 육각형의 틀에 봉황, 용, 인면조(사람 얼굴의 새), 쌍조, 길상조 등을 역동적·입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육각형 밖에는 상서로운 짐승을 배치했습니다. 구획 내부의 빈 공간에는 직경 2~4㎜ 내외의 사람 얼굴을 원형으로 표현했습니다.

바닥판을 볼까요. 바깥쪽에 불꽃무늬를 두고 앞코부터 귀신얼굴-쌍조-용(가운데)-쌍조-역사상의 순으로 배치했습니다. 특히 바닥판의 용무늬는 곧게 선 뿔에 날카로운 눈, 화염을 뿜는 듯 벌린 입과 역동적인 몸체, 내부 비늘까지도 섬세하면서 입체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스파이크는 직경 2.0㎜ 내외의 꽃잎(6엽) 중앙에 원뿔꼴 형태로 배치했습니다. 바닥판 곳곳에도 역시 원형의 사람 얼굴 문양을 익살스럽게 표현했습니다. 꼭 숨은그림찾기 같습니다.

40대 여성 지도자를 위한 명품 구두?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영산강 유역인 전남 나주평야에 자리 잡은 고분군이 있는데요. 유명한 복암리 고분군이죠.

3~7세기까지의 무덤이 모인 ‘아파트형 고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1996년 복암리 3호분에서 대형 옹관묘가 26기 출토되고 금동신발 등 최상급 유구와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복암리 고분군에서 600m 떨어진 잠애산 구릉(114m)에 또 하나의 고분이 있는데요. 복암리 3호분을 감시하듯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정촌고분입니다. 두 고분(복암리와 정촌)의 선후와 주인공의 위상 등이 관심거리였죠.

2013년부터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바로 정촌고분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1년 뒤인 2014년 심상치 않은 발굴성과를 얻어냈습니다. 정촌고분에는 총 14기의 무덤이 차례차례 조성됐는데요. 그중 너비 355㎝, 길이 48㎝, 높이 296㎝ 규모의 널방(주검이 안치된 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1호 석실)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무덤은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권에서 확인된 굴식돌방무덤 가운데 최대 규모입니다. 이 무덤 피장자가 당대(450~525) 복암리 3호분의 주인공까지 거느리고 있었다는 방증이 되는 겁니다.

발굴결과 정촌고분의 굴식돌방무덤(1호 석실)에는 3기의 목관이 차례로 안치됐는데요. 그중 2개체의 인골이 확인됐습니다.

사진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사진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그 가운데 머리뼈와 턱뼈만 확인된 한개체의 인골 연대가 5세기로 측정됐습니다. 또 이 인골이 신은 것으로 보이는 금동신발 속에서 발목뼈 조각 1개와 파리번데기 껍질이 다량 확인됐는데요. 번데기 껍질에서 추출한 콜라겐으로 연대를 측정해보니 400~420년,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와 마구류(말갖춤새) 등의 연대는 450~475년으로 추정됐습니다.

인골(5세기)과 파리번데기(400~420), 토기 및 마구류(450~475) 등의 연대를 비교 분석하면 늦어도 ‘475년 전후’로 조성된 고분(1호분)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금동신발 속에서 1550년 전 발견된 파리번데기 껍질이라니 참 신기하죠.

정촌고분의 또 하나의 특징은 1차와 3차 목관의 주인공들인 두 인골이 모두 여성으로 추정된다는 겁니다.

2017년 가톨릭대 산학협력단이 두 인골의 3차원 계측 결과를 한국인의 성별판별 공식에 대입해본 결과 둘 다 여성으로 추정했습니다. 두 인골의 치아 상태로 측정한 나이는 45~47세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 영산강 유역의 너른 들판을 호령한 수장이 ‘40대 여성’이라는 얘기가 되는 건가요.

승천하는 S자형 용 정촌고분의 또 다른 특징은 고창 봉덕리 출토품에 비견할 만한 명품 구두, 즉 금동신발(왼쪽 311㎜·오른쪽 318㎜)이 출토됐다는 겁니다. 제작방법을 볼까요. 구리판을 신발틀에 맞추고 재단한 후 문양을 오려내고, 그 주변으로는 날카로운 도구(끌)로 상세하게 찍어 문양을 잘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좌우 측판은 어떻게 접합할까요. 발등 쪽인 앞쪽에는 우측판을 위로, 뒤꿈치 쪽은 좌측판을 위로 덮어 3개의 리벳으로 고정했습니다. 쉽게 떨어지지 않게 서로 잡아준 겁니다.

뛰어난 기술이죠. 좌우 측판 하단에는 너비 0.4cm 정도 ‘ㄴ’자로 구부려 투각(뚫거나 오린) 문양의 바닥판을 안쪽에서 걸쳐 빠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에 용머리가 표현된 긴 장식을 발등 중앙에 리벳으로 고정했습니다.

봉덕리와 정촌 금동신발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문양은 용, 봉황, 인면조신(人面鳥身), 새, 괴수, 연화문 등입니다. 그러나 디테일로 들어가면 다소간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용 장식입니다. 봉덕리 신발의 용 문양은 좌우 각각 29개로 총 58개이며, 이중에는 날개 달린 용도 좌우 측판에 각각 4개씩 8개가 확인됩니다. 반면 정촌 신발의 용 문양은 모두 36개인데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정촌 신발의 발등에 마치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S자형 용 장식이 시그니처 문양입니다. 일신양두(一身兩頭·몸이 하나이고 머리가 두개) 문양도 확인됩니다. 반면 봉덕리 신발에서는 기(氣)를 표현한 것 같은 기하학과 원형 인물, 쌍조 등의 문양이 보입니다. 또 다른 점은 봉덕리 신발은 왼쪽과 오른쪽 신발의 문양이 대칭을 이루지만(동일하지만), 정촌 신발은 좌우 신발이 약간 다릅니다.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어떨까요.

봉덕리 신발의 바닥판은 바깥쪽에 불꽃무늬를 두고 앞코부터 귀신얼굴-쌍조-용(가운데)-쌍조-역사상의 순으로 배치했다. 바닥판의 용무늬는 곧게 선 뿔에 날카로운 눈, 화염을 뿜는 듯 벌린 입과 역동적인 몸체, 몸의 비늘까지도 섬세하면서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봉덕리 신발의 바닥판은 바깥쪽에 불꽃무늬를 두고 앞코부터 귀신얼굴-쌍조-용(가운데)-쌍조-역사상의 순으로 배치했다. 바닥판의 용무늬는 곧게 선 뿔에 날카로운 눈, 화염을 뿜는 듯 벌린 입과 역동적인 몸체, 몸의 비늘까지도 섬세하면서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연구자들은 ‘발등 끝 용 장식과 일신양두 문양’ 등에서 보듯 문양의 다양성 면에서는 정촌 신발을 꼽을 수도 있답니다.

그러나 제작기술 등을 고려하면 봉덕리 신발이 더 섬세하고 정교하답니다. 또한 기(氣)를 표현한 듯한 기하학 문양 등의 배치로 미뤄보아 봉덕리 신발의 연대가 20~50년 정도 앞설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는 거죠. 제작자의 취향일 수도 있고, 시대에 따라 달라진 유행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신선되어 하늘로 나르샤’ 정촌 신발에 특징적으로 표현된 ‘발등 끝 용머리 장식’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최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정촌고분의 보물지정을 기념해서 발간한 도록(<신선되어 하늘 나르샤>)에 특별한 연구성과가 포함됐는데요. 성윤길 학예연구사는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문양에 대한 고찰’에서 “발등 끝 용머리 장식 등 용 문양(36개)은 무덤의 주인공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기를 바라는 백제인의 사후 세계관을 담은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바닥판에 큰 용이 좌우 29마리씩 58마리를 이끄는 듯한 봉덕리 신발도 비슷한 모티브라는 건데요.

다른 예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동명성왕·재위 기원전 37~기원전 19)이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는 ‘광개토대왕 비문’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발 이곳저곳에 용 문양을 새겨 무덤 주인공의 승천을 기원했다는 겁니다. 특히 정촌 금동신발의 발등에는 주인공의 사후 세계를 인도할 용의 무리를 진두지휘하는 우두머리를 장식했다는 설명이죠.

봉덕리나 정촌 신발 속에서 발견된 뼛조각이 중요한 시사점이라는데요. 피장자가 금동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신발의 발등은 당연히 하늘을 향해 있게 된다는 거죠. 특히 봉덕리 신발보다 약간 늦게 제작된 정촌 신발의 장인은 발등에 우두머리용 한마리를 ‘화룡점정’하듯 세워놓았다는 겁니다.

봉덕리 고분에서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금동신발 1켤레가 나왔다. 출토된 금동신발 속에서는 작은 뼛조각과 직물 흔적이 확인됐다. 피장자의 버선 발에 신겨서 안장한 장례용 신발이었다. /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봉덕리 고분에서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금동신발 1켤레가 나왔다. 출토된 금동신발 속에서는 작은 뼛조각과 직물 흔적이 확인됐다. 피장자의 버선 발에 신겨서 안장한 장례용 신발이었다. /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또 중국 최초의 신선 설화집인 <열선전>은 “황제(黃帝·전설상 한족의 조상)가 죽은 뒤 산이 무너져 관이 드러났는데, 칼과 신발만 남았다”고 했다는데요. 시체는 없고 칼과 신발만 남았다는 것은 승선, 혹은 승천의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한답니다.

정촌고분에서도 금동신발과 함께 모자도(母子刀·큰 칼 옆에 작은 칼이 붙어 있는 장식용 칼)가 출토됐거든요. 흥미로운 고고학적 상상력입니다.

백제 명품신발에 열광하다 금동신발의 제작자는 누구일까요. 연구자들은 대체로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의 지도자(봉덕리·정촌고분 주인공)들에게 하사한 일종의 위세품이라고 해석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백제는 마한의 50여개 소국을 통합해 세운 나라인데요.

태생부터 중앙집권보다는 지방분권을 지향한 왕국임을 알 수 있죠. ‘광개토대왕 비문’은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고 58성, 700촌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백제가 성(城)과 촌 단위로 조직됐음을 알려주는 단서죠.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침략 이후 국세가 위축됐지만 나제동맹(433) 등으로 한숨을 돌렸고요. 한성백제 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에 구가했던 전성기의 문화를 어느 정도 이어가고 있었죠. 바로 이 무렵 백제 중앙정부가 ‘위세품’을 사여해 지방세력의 이탈을 막는 한편 그들을 매개로 거점지역을 간접 지배했다는 겁니다.

한가지 흥미 있는 포인트가 있는데요. 봉덕리 금동신발의 경우 경주 식리총(飾履塚) 출토품과 제작기법 및 문양이 매우 흡사하다는 겁니다. 신발 양쪽의 판을 하나씩 제작해 결합하는 제작기법은 완전히 백제식입니다. 특히 육각형 구획 안에 괴수와 인면조 등 무늬의 구성도 비슷하고요. 이것은 백제가 신라에 보낸 선물이었거나, 신라 왕·귀족이 당대 명품인 백제산 금동신발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식리총은 475~500년 사이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되는데요.

당대 백제 금동신발(5세기 초반)의 수준도 같은 시대 신라나 가야, 일본에서는 범접할 수 없었다고 하네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룬 왕국이 백제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죠. 그렇다면 한성백제 시기에 신라인들은 금속공예기술의 꽃을 피운 백제의 명품신발에 열광했을 것 같습니다.

1500년 전 백제 금동신발의 수준은 같은 시대 신라나 가야, 일본에서는 범접할 수 없었다. 한성백제 시기에 금속공예기술의 꽃을 피운 백제의 명품신발에 열광했을 것 같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1500년 전 백제 금동신발의 수준은 같은 시대 신라나 가야, 일본에서는 범접할 수 없었다. 한성백제 시기에 금속공예기술의 꽃을 피운 백제의 명품신발에 열광했을 것 같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이런 백제산 금동신발의 전통이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475) 이후에는 점차 사라집니다. 이후 지방세력에 내려준 금동신발(나주 복암리 3호분·나주 신촌리 9호 을관) 등은 봉덕리 출토품과 사뭇 다르거든요. 화려하고 섬세한 제작기법 대신 점을 연속으로 찍어 선을 나타내는 ‘점선조 기법’으로 돌아갑니다.

고구려의 침입(475)과 웅진 천도 이후 금속기술이 단절됐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입니다.

백제는 고구려 침입과 개로왕의 전사 그리고 웅진 천도라는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했고, 국력 또한 급전직하했잖습니까. 금속기술 역시 단절됐다가 40여년이 지난 6세기 전반기에 겨우 회복된 것 같습니다. 523년에 조성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금동신발이 그것인데요. 그래도 왕과 왕비가 신은 장례용 신발인데 기법도, 문양도 정제되고 세련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군요.

물론 이것은 제작기법과 문양 새김의 차이, 즉 유행이 바뀐 탓이라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5세기 중후반까지 화려한 꽃을 피운 백제 명품신발의 전통이 사라졌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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