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공부지옥’에 허우적댄 조선의 임금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2.03.21

“세자(양녕대군)가 주상(태종)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에 맞지 않는 일이 많았다. 주상(태종)이 세자를 꾸짖었다…. ‘세자는 어째서 언행에 절도가 없느냐. 스승(서연관)이 가르치지 않더냐.’ 그 말을 들은 세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1782~1786)가 1784년 1월 스승인 보양청 소속 보양관들과 상견례하는 모습을 그린 궁중행사도인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1753~1786) 사이에 낳은 첫째 아들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1782~1786)가 1784년 1월 스승인 보양청 소속 보양관들과 상견례하는 모습을 그린 궁중행사도인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1753~1786) 사이에 낳은 첫째 아들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405년(태종 5) 10월 21일 실록 기사입니다. 평소 세자의 행동거지에 불만을 품고 있던 태종이 이날 작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세자를 불러 함께 수라를 들면서 “밥상 예절이 어찌 그 모양이냐”고 꾸짖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태종은 이날 공부를 소홀히 하는 세자의 내관인 노분의 볼기를 때렸습니다. 심상치 않은 임금의 심기에 세자의 스승들이 세자궁에 모여 “학문에 힘쓰지 않으면 이것은 불효”라고 진땀을 흘리며 세자를 타일렀습니다. 실록은 “세자가 임금이 ‘읽은 글을 암송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고 전했습니다.

폐위된 세자(양녕대군·1394~1462)를 대신해 성군의 치세를 이룬 세종(재위 1418~1450)은 훗날 1405년의 일화를 꺼내며 다시금 밥상머리 교육을 강조합니다. “양녕대군이 세자였던 시절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과실이 많아 부자 사이가 멀어진 것을 내가 보았다. 나(세종)는 지금 세자(문종)와 세차례씩 같이 식사하고 있다….”(<세종실록> 1438년 11월 23일)

아무리 부자지간이지만 아버지이기에 앞서 지존인 임금과의 식사가 편했을까요. 밥상머리에서 혼쭐난 양녕대군도 그렇지만, 문종(재위 1450~1452) 역시 부왕(세종)과 세차례씩 겸상을 했다니 밥이 제대로 넘어갔을까요.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 스승인 권근(1352~1409)의 훈계가 의미심장합니다.

“세자는 과거에 급제할 필요가 없다고요. 아닙니다. 보통 사람은 한가지 재주로도 입신출세할 수 있지만 윗사람(임금)은 배우지 않고는 정치를 할 수 없고 정치를 못 하면 나라가 곧 망합니다.

그래서 원자(元子·세자로 책봉되기 전의 맏아들)와 세자를 ‘나라의 근본’, 즉 ‘국본(國本)’이라 한 겁니다. 훗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책임질 ‘어린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든 원치 않든 원자-세자로 책봉된 어린이의 운명이었습니다.

왕실의 아기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특별한 의식을 치렀습니다. 잘 씻은 탯줄을 태항아리에 넣은 뒤 태실(胎室)에 정중하게 봉안하는 일이었는데요. 태를 사람의 인성을 결정하는 생명선으로 여겼으며,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예뻐지고 단정하게 된다”(<세종실록> 1436년 8월 8일·<문종실록> 1450년 9월 8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자는 과연 천재로다!” 원자의 조기교육은 3세 무렵까지 보양청에서 맡았습니다. 보양청의 실무보양관 10여명이 서책 및 숙직, 글씨, 심부름 등 역할을 분담해 세자가 되기 전에 갖춰야 할 덕목을 쌓도록 가르쳤습니다. 전설적인 이야기가 내려옵니다.

정조(재위 1776~1800)는 세손 시절부터 붓과 먹을 가지고 놀고, 책 읽는 시늉을 했으며 효자와 공자의 일생을 그린 그림을 보며 흉내내기를 좋아했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는 너무 일찍 일어나는 어린 아들을 걱정했는데요. 그럴 때마다 정조는 “등잔 그림자를 가리고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다”(<정조실록> ‘혜경궁 홍씨가 내린 행록’)고 합니다.

정조에 버금가는 이가 중종(재위 1506~1544)의 원자(인종·재위 1544~1545)였답니다. 만 2세도 안 되는 때에 <천자문>과 <유합(類合·한문학습서)>을 절반이나 외웠다고 합니다. 중종은 “한번 들으면 곧 외우니 이 어찌 보통 아이겠느냐”고 칭찬했다는데요.

태조 이성계의 태항아리와 태실. 우리 조상들은 태를 잘 씻어 태항아리에 넣은 뒤 길지를 찾아 조성한 태실에 정중하게 모셨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태조 이성계의 태항아리와 태실. 우리 조상들은 태를 잘 씻어 태항아리에 넣은 뒤 길지를 찾아 조성한 태실에 정중하게 모셨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중종은 어린 인종을 세상에서 둘도 없는 천재라 여겼다는 거죠. 지금도 “우리 애는 천재야 천재!”라고 착각하지 않습니까. 중종이 아들의 천재성을 보고 감탄만 하지 않고, 누누이 강조한 말이 있었습니다.

“학문에 정진하라. 스승을 존대하고… 선(善)을 좋아하고 인(仁)에 힘쓰라. 재물을 늘리지 말라.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마라.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마라. 소인과 가깝게 지내지 마라.”(<중종실록> 1517년 4월 13일)

3세까지 보양청이 맡은 원자의 교육은 4~6세부터 강학청이 맡았습니다. 이때 가장 먼저 행하는 의식이 있었는데요.

바로 원자(세자)와 사부(스승)의 상견례였는데요. 아무리 원자의 지위가 높다 한들 코흘리개가 늙수그레한 재상급 스승을 맞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예컨대 1665년 현종은 “원자(숙종)가 수염 난 사람들을 보기 싫어한다”면서 “일단 한사람씩 들어오고 친해진 다음에 많이 들어오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원자의 공부는 <천자문>과 <유합> 등으로 한글자씩 습득한 이후에 스승 앞에서 외우고(배강·背講) 새로운 글자를 더하는 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늘 붓과 종이를 곁에 두고 글자를 익히게 했는데요.

학습에 들어가기 전에는 원자에게 조청 두숟가락을 먹였다고 합니다. 왜 당 떨어진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흡수가 빠른 당분을 섭취시켜서 수업 전에 머리를 맑게 하려는 것이었겠죠. 무정과(조청에 절인 무)와 콩시루떡 같은 각종 콩 관련 주전부리 등을 먹였고, 꿀에 잰 인삼정과와 인삼차 등도 단골 메뉴였답니다.

원자가 책 한권을 떼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일종의 발표회도 열었는데요. 이걸 회강(會講)이라 합니다.

원자의 학습 진도가 좋으면 임금은 그 노고를 격려하고 스승들에게 다과상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1757년(영조 33) 10월 19일 영조 임금은 원손(정조)을 불러 스승(남유용·1698~1773)에게 배운 내용을 점검해보았는데요. 정조는 “네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 스승의 존칭을 생략한 채 ‘남유용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영조는 “임금 앞이라 이름 자를 그대로 불렀나 보구나”라고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영조는 원손이 <동몽선습> 내용을 줄줄 외우는 것을 보고 “외우는 소리가 쇳소리처럼 쨍쨍하다”고 즐거워하면서 스승 남유용에게 농을 던졌습니다.

“경(남유용)이 시험을 보면서 혹시 하생(낙제점)을 준 적이 있는가.”

“아닙니다. 원손이 늘 잘 외워 낙제점을 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조는 눈물까지 흘리며 감격스러워하면서 남유용에게 호피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상이 아니다. 나라의 종사를 위한 것이다.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은 (위엄을 갖춘 엄한) 스승이 되라는 뜻이다.”

1817년(순조 17) 3월 11일 효명세자 성균관 입학식을 기록한 <왕세자입학도첩> 중 왕세자가 스승에게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는 장면을 그린 ‘입학도’.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거나 받을 때는 스승이 동쪽에 있고, 학생인 세자는 서쪽에서 깍듯하게 예를 취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817년(순조 17) 3월 11일 효명세자 성균관 입학식을 기록한 <왕세자입학도첩> 중 왕세자가 스승에게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는 장면을 그린 ‘입학도’.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거나 받을 때는 스승이 동쪽에 있고, 학생인 세자는 서쪽에서 깍듯하게 예를 취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과거급제는 필요 없었지만… 원자의 교재는 유교의 기본 정신을 담은 책들이었습니다. 어진 군주, 즉 인(仁)과 덕(德)을 갖춘 지도자를 만들기 위한 책들이죠. 지식의 전달보다는 인성교육, 즉 효와 예절교육에 중점을 두었는데요.

그중 <소학>은 유교 윤리의 핵심을 논하고 한나라~송나라 성현의 언행을 담은 책입니다.

“소학에서는… 부모와 웃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존중하며 벗과 친하는 도리를 가르쳤다. 이것은 스스로를 닦고 집안과 나라를 다스려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일의 근본이다.”(<소학> ‘서제’)

훗날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릴 책무가 있는 원자-세자에게 <소학>은 제왕학의 핵심 필수 교재였습니다. 그러기에 15세까지는 <소학>을, 이후에는 사서삼경(논어·대학·중용·맹자·시경·서경·역경)을 배웠습니다. 과거시험 때문에 사서를 배우는 일반 자제들과는 다른, 이를테면 인성교육 위주의 커리큘럼을 왕가에서 채택했다는 뜻입니다.

영조는 “일찍이 나도 <소학>을 100번쯤 읽었기 때문에 지금도 줄줄 외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유교의 기본 덕목 중 가장 기본인 효(孝)를 중시했기에 공자가 증자에게 전한 효도의 내용을 편찬한 <효경>도 필수과목이었습니다.

이밖에 최세진(1468~1542)의 한자 자습서인 <훈몽자회>와 박세무(1487~1564)의 <동몽선습>, 율곡 이이(1536~1584)의 아동서 <격몽요결> 등도 15세까지 배워야 할 이른바 기본과목이었습니다.

임금 앞에서 암송해야 했다 원자(혹은 원손)을 왕세자로 공식 책봉하면 본격적으로 제왕학의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왕세자로 책봉되면 길일을 잡아 성균관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배움을 청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상하죠. 왕실에 세자(세손)를 위한 교육기관(시강원)이 있는데 왜 굳이 성균관에서 입학식을 치렀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만고의 스승인 공자님께 술잔을 올리고 박사(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의식을 통해 왕세자 역시 학생 출신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의미였습니다.

순조(재위 1800~1834)의 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가 창경궁에서 나와 성균관에서 입학하는 모습을 그린 ‘왕세자 입학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세자가 성균관 대성전에서 공자 등 유교 성현에게 제사를 올린 뒤 스승에게 깍듯하게 배움을 청하는 의식입니다. 그렇게 학생이 된 왕세자가 거르지 않아야 할 공부가 바로 서연(書筵)이었습니다.

세자의 공부, 즉 서연을 담당한 관청은 세조 때에 설치한 세자시강원이었는데요. 교육은 크게 하루에 세 번 치르는 법강(法講·아침, 점심, 저녁 강의)과 불시에 받는 소대(召對) 및 야대(夜對), 그리고 한달에 두 번씩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회강(會講)이 있었습니다. 공부는 그날 학습한 문장을 책을 덮고 외우는 ‘배강(背講)’의 원칙을 따라야 했는데요. 경서 내용을 모두 외워야 하는 배강은 왕세자들을 고달프게 했답니다. 몸이라도 아프면 죽을 맛이었는데요.

정조가 원손(세자) 시절 쓴 한글 편지. ‘가을바람에 편안하신지 문안알기를 바라며, 뵈온 지가 오래되어 그리움이 있었는데 어제 편지를 받아보고 마음든든하고 반가운 마음입니다. 할아버지께서도 편안하시다 하니 기쁘옵니다. 원손’이라 썼다. /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정조가 원손(세자) 시절 쓴 한글 편지. ‘가을바람에 편안하신지 문안알기를 바라며, 뵈온 지가 오래되어 그리움이 있었는데 어제 편지를 받아보고 마음든든하고 반가운 마음입니다. 할아버지께서도 편안하시다 하니 기쁘옵니다. 원손’이라 썼다. /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실록을 보면 숙종 임금까지 나서서 “임금이 강의하는 <중용>에 한해서만 배강(공개 암송)하도록 하고 다른 책들은 임강(臨講·책을 보면서 해석하는 일종의 오픈북 테스트)하게 해라. 세자(경종)의 다리질환이 심하다.”

배강뿐 아니라 한달에 2~3회씩 스승과 임금, 여러 신하 앞에서 학문의 수준을 시험받는 ‘회강(會講)’ 역시 왕세자들을 옥죄는 수업이었습니다. 1744년(영조 20) 사도세자(1735~1762)가 회강 때 경서 내용을 빠뜨린 왕세자에게 ‘통(通·합격점)’을 준 시강관이 문책을 당했습니다. 영조는 “세자의 지혜가 한창 자라고 있는 판국에 스승이라는 자가 세자의 마음만 맞추려 하느냐”면서 호되게 꾸짖었답니다.

반면 정조는 왕세손으로 무려 15년간(1762~1776) 있으면서 제왕학 교육을 제대로 받았는데요.

“15년간 동궁으로 있으면서 어른의 침실에 문안을 올리거나… 경서 공부에 마음을 쏟아 부지런히 했다. 왕위에 올라서는 제대로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끼니도 제때 때우지 못하면서 틈만 나면 좌우에 책을 두고 밤낮으로 사색에 잠겼다.”(<정조실록> ‘행장’)

지도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그럼 왕위에 올라서는 어땠을까요.

“의복은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때가 묻고 솔기가 터진 것도 싫어하지 않았다. 노리개도 아예 붙이지 않았다.”(<정조실록> ‘행장’ )

“여름에 입은 모시 적삼이 자주 빨아 실오라기가 엉성해졌다. 신하들이 ‘새 옷을 세탁하고 입으시라’고 주청하자 임금이 말했다. ‘아깝다. 내가 입지 않은 옷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있지 않겠느냐.’”(<홍재전서> ‘일득록·훈어 3’)

“몹시 더운 여름날 과인은 넓은 집에서 가벼운 갈옷을 입고서도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끼는데 하물며 저 찌는 가마 속같이 더운 오두막집과 달팽이 같은 작은 집에서 어떻게 이 더위를 보내는지….”(<홍재전서> ‘일득록·훈어 3’)

정조야말로 왕실교육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 즉 실천의 미학을 구현한 군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교육은 결국 백성을 향한 임금의 마음씨로 통했습니다.

여말선초의 문인학자인 권근은 1402년(태종 2) 태종에게 “요 임금의 덕을 이룰 때까지 학문을 그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는데요. 성인 정치의 끝판왕이라는 ‘요임금이 될 때까지’라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공부해도 어느 분은 성군이나 명군이 되고, 또 어느 분은 혼군이나 암군, 폭군이 되었습니다. 한 나라와 백성을 책임질 지도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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