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공정과 능력주의는 고립된 수험생 세계서 태어난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2021.12.20

능력주의에 관한 최근의 논의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능력주의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능력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찾기도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능력주의를 비판하든 지지하든 이 말을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의 번역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있다. 하지만 메리토크라시는 능력주의가 아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능력주의와 메리토크라시

메리토크라시는 말 그대로 ‘메리트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이때 메리트(merit)는 ‘능력’이 아니고, 크라시(cracy)도 ‘주의’가 아니다. 메리트는 좋음, 가치 있음, 훌륭한 자질, 탁월함, 뛰어남 등을 의미한다. 동사로 쓰일 때는 ‘무엇을 받거나 얻을 만하다’, ‘그럴 자격이 있다’ 정도로 옮길 수 있다. 메리트는 한국에서도 ‘장점’, ‘유익한 점’ 등의 의미로 널리 쓰이는 외래어다. 물론 능력도 메리트의 한 종류에 포함될 수 있지만,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능력을 어떻게 정의하든지 메리트는 그보다 훨씬 넓은 외연을 가진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탁월한 자(the meritorious)의 지배라는 발상이 플라톤의 ‘철학자 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저 영어 단어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철학자 왕은 졸지에 그냥 능력자의 한 종류가 돼버린다. 메리토크라시를 굳이 번역하자면, ‘탁월함에 의한 지배’, ‘탁월한 자에 의한 지배’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능력주의라는 한국어 단어의 사회적 사용을 관찰해보면 메리토크라시와 다른 맥락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메리토크라시라는 개념은 ‘탁월한 자가 공동체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는 전제 자체를 문제로 삼는다. 마이클 영 이후, 이 개념이 주로 지시하는 것은 지식 엘리트 집단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다. 위계적이고 서열화된 현대교육체계는 표준화된 평가 방식을 통해 메리트를 측정하고, 지식수준에 따라 정치권력이 차등 배분되는 사회를 재생산한다. 메리토크라시를 지지한다는 것은 이런 상황을 긍정한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의 능력주의가 메리토크라시를 지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는 능력주의의 관심사가 아니다. 능력주의는 간단명료하다. 그냥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공정한 시험을 통과해 ‘명문대’에 들어갔다면, 그에 맞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능력주의는 오로지 여기에만 관심이 있다. 그동안 능력주의라는 말은 지겨울 정도로 쏟아져 나왔지만 그 외의 문제들, 예컨대 지식 엘리트 집단에 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메리토크라시와 능력주의는 비슷한 상황과 문제를 다루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전자에 관한 논의는 항상 정치적 맥락에 위치하지만, 후자는 시험과 보상 그 이상의 생각을 거부하는 반정치적 담론이다.

능력주의와 공정

능력주의와 메리토크라시 사이의 간극은 ‘공정’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방식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메리토크라시는 공정의 적이지만 능력주의는 공정에 의존한다. 주의할 것은 앞의 ‘공정’과 뒤의 ‘공정’도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공정 개념, 특히 존 롤즈가 정식화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원칙을 의미한다. 핵심은 기회의 평등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기회의 평등을 형식적으로 보장하지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그것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킨다. 이로 인해 메리토크라시가 강화되고, 불평등 구조가 재생산된다. 메리토크라시는 공정을 향한 가장 강력한 위협인 것이다. 반면 능력주의는 능력에 맞는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이라고 본다. 그러한 보상에 앞서 기회의 평등이 보장됐는지, 그 보상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또한 능력주의는 공정이라는 말로 능력을 정의한다. 시험이 공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면, 그 결과가 곧 개인의 능력을 결정한다. 이때 공정이란 ‘부정부패와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인 평가 방식’ 정도의 의미다. 결국 전통적 공정 개념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가산점이나 할당제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공정한 조치로 평가되지만, 한국의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은 그것을 가장 불공정한 장치로 간주한다.

능력주의와 공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여러가지 수사로 포장돼 있지만, 그 핵심 의미는 대부분 시험과 평가로 환원된다. 공정이란 평가의 공정을 의미하고, 능력주의란 시험 잘 본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믿음이다. 능력주의는 오래전부터 한국사회를 지배해왔다. 이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삶의 첫 번째 목표는 시험을 보고, 좋은 성적을 얻고, 사회의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은 시험감독관과 다름없다. 시험을 공정하게 진행함으로써 능력에 맞는 보상이 주어지도록 하는 것이 임무다. 국가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고, 이제 시민은 눈을 부릅뜨고 부정과 특혜 없는 공정한 시험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는 다른 모든 사회·정치적 가치를 압도한다.

능력주의와 공정의 이러한 특징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이 시민의 원칙이 아니라 수험생의 원칙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수험생은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채 오로지 시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시험을 잘 보면 정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시험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무너지면 수험생의 세계도 무너진다. 한국에서는 시민이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수험생으로서 살도록 강요받는다. 많은 이들이 능력주의와 공정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험생으로서의 시민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원칙에 매달린다. 하지만 수험생의 세계에서 태어난 원칙이 공동체의 생존을 보장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정치도 없고 사회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그 원칙은 너무나 빈약하고 앙상하다. 개인과 공동체가 수험생의 세계에서 벗어나 시민의 세계를 구성하지 않는다면 모두의 생존에 필요한 질문은 앞으로도 무관심의 영역에 버려져 있을 것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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