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야 공주 이야기

고장원 SF평론가
2021.11.15

양손에 떡을 쥐려던 여인의 눈물

다카하다 이사오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2013)는 일본 최초의 모노가타리이자 원형적 SF로 꼽히는 고대설화 <다케토리 이야기>가 원안이다. 원형적 SF는 현대 SF의 효시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발표된 문학작품 가운데 원시적이지만 과학적 상상이 두드러진 예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는 지구 이외 천체에 인간들처럼 지적 존재가 거주하는 사회가 나오며 여주인공 ‘가구야’는 달에서 온 외계인이다. 월인(月人)사회는 성간비행정을 타고 달과 지구 사이를 넘나들며 천황의 무장병력을 단번에 와해시킬 만큼 고도의 기술문명을 지녔으나 자기네끼리도 뜻이 안 맞으면 동족상잔을 벌이며 여주인공처럼 전쟁고아를 낳기도 한다는 점에서 중세 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가 제창한 다원론적 우주관과 맞닿아 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 포스터 / 대원미디어,롯데엔터테인먼트

<가구야 공주 이야기> 포스터 / 대원미디어,롯데엔터테인먼트

애니메이션 버전은 원작을 갈고 다듬어 ‘남의 떡이 커 보여도 양손에 다 쥘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의 이치임을 설파한다. 원작에서 가구야는 달나라 공주지만 지브리 각색판에서는 그저 달나라 사람 중 한명이다. 원작에서처럼 전란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지구로 보내진 게 아니다. 대신 단조로운 유토피아 사회에 따분함을 느낀 나머지 가구야가 아래 세상을 엿보다 발각되어 그 벌로 기억이 지워진 채 지구로 유배된 처지다.

요는 막상 지구에서 살아보니 이쪽도 그리 녹록지 않다는 데 있다. 가구야의 신분을 귀하게 만들고자 달나라에서 받은 재물을 써서 수도의 권문세가들과 활발하게 교분을 맺는 나무꾼 출신 양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자면 예법 가정교사의 번지르르한 예절을 익혀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녀의 소문난 미모를 흠모해 달려드는 황족과 귀족 자제들의 집요한 구혼공세를 면전에서 무안하지 않게 지능적으로 번번이 따돌려야 한다. 지구에서의 삶은 점차 환멸을 향해 치닫고 이러한 혐오는 그를 자기 멋대로 후궁으로 들이려는 천황의 추태에서 절정에 달한다. 결국 지구를 떠나고픈 가구야의 간절한 바람은 무의식을 통해 달나라에 전해진다.

가구야는 마음의 평정과 자유를 동시에 원했지만, 달나라도 지구도 각기 하나씩밖에 줄 수 없었다. 가구야의 이야기는 과하게 욕심부리지 말고 겸허하게 살 것을 권한다. 욕구불만에 찬 그의 구조신호 송출 결과, 그는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던 양부모 곁을 눈물 펑펑 흘리며 떠나게 됐잖은가. 공상세계를 통해 기만에 찬 당대 상류 귀족사회를 풍자한 <다케토리 이야기>는 후세 모노가타리들뿐 아니라 다카하다 이사오의 현대적 각본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어디 그뿐인가. 2007년 지구의 움직임을 최초로 HDTV 카메라로 촬영한 일본우주항공국(JAXA)의 달 탐사위성 ‘가구야’ 또한 바로 이 여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가구야는 양손에 떡을 쥐려다 끝내 소환된다. 부모가 주선한 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현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더라면 입은 삐죽 나올지언정 살가운 양부모와 지구에서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었다. 정 싫다면 고향에 돌아가 연모하던 시골 오빠와 가난하지만 솔직담백한 삶을 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구야는 번번이 저울질하다 기회를 놓치고 가장 원치 않았던 달로 끌려간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 발등을 찍는다. 그러니 어떤 업보를 치르던 그 또한 자기 몫일 수밖에.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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