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쌍욕에 신상털기까지 조선판 댓글문화

요즘 댓글문화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130년 전에도 일종의 댓글문화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도서대여점(세책점)에서 빌린 소설책에 독자들이 툭툭 써내려간 낙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요즘의 댓글이 아니겠습니까.

매국노 이완용을 욕한 낙서. 소설의 내용 사이사이에 붉은 글씨로 “대역부도한 이완용” 운운이라고 썼다. 공개적으로 고관대작을 비판할 수 없는 조선 민중의 울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 유춘동 강원대 교수 제공

매국노 이완용을 욕한 낙서. 소설의 내용 사이사이에 붉은 글씨로 “대역부도한 이완용” 운운이라고 썼다. 공개적으로 고관대작을 비판할 수 없는 조선 민중의 울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 유춘동 강원대 교수 제공

국권이 침탈되던 당대 소설책에 쓰인 낙서 가운데는 암울한 시대상황을 꼬집고 풍자하는 이른바 ‘시국 댓글’이 있었습니다. 낙서, 즉 당시 댓글의 주공격 대상은 매국노 이완용(1858~1926)과 송병준(1858~1925) 등이었습니다.

“이완용 놈아! 내 손에 죽으리라!” “이완용 놈아… 네 몸이 남지 못하리라”, “대역부도 이완용아, 네가 무슨 일로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이 나라 망하게 놓은 자는 누구냐 하면 이완용과 송병준이라 하니… 두 놈을 잡아내 장안에서 만민의 원수를 갚으세”, “천하에 몹쓸 놈 아무 때 죽어도 내 손에 죽으리라. 총리대신 이완용 개자식.”

대놓고 욕할 수 없었던 매국노를 향한 조선 민중의 울분을 대여점 소설책에 고스란히 풀어놓은 겁니다.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한 댓글도 제법 눈에 띄었는데요. 어떤 댓글은 “심심하니까 이런 고담(옛 이야기·소설)만 보겠지만, 이젠 고담을 보지 말고 학교에 가서 교사합시다”라고 당부합니다. 소설에만 빠지지 말고 신식교육만이 살길이라고 당부하고 있는 거죠. 가없는 항일의식을 표출한 댓글도 있습니다. “우리 대한국 이천만 동포들아! 언제나 자주독립하여… 대한 동포끼리 살아볼까. 이 책 보는 동포들은… 아무쪼록 정신을 차려서 일본을 다 죽이고 삽시다.”

순수하게 소설의 내용에 대한 독자의 감상과 촌평도 있었습니다. <삼국지>를 읽고 “이 책은 <삼국지>가 아니라 <망국지>”라 하는가 하면 “가련타! 유황숙(유비)이여! 통일 천하하기 전에 영안궁에서 귀천하니 천도가 무심하다”는 댓글을 단 이가 있습니다.

조선판 ‘악플’과 신상털기 이런 댓글도 있지만 요즘처럼 익명성에 기댄 지독한 욕설과 신상털기 등의 악플은 지금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중에는 책대여값이 비싸다며 도서대여점 주인을 겨냥한 댓글(낙서)도 줄을 잇습니다. 개중에는 월남과 파란(폴란드)의 망국사까지 들먹이며 세책점 주인을 비판한 낙서가 눈길을 끄네요.

“월남과 파란(폴란드)의 망국사를 보지 못했는가. 이런 세계에 음담패설로 꾸민 언문 이야기책을 돈 받고 세를 놓을 게 뭐냐… 내 말을 그르다 말고 이후에는 책세를….”

이건 양반입니다. 차마 눈과 입에 담을 수 없는 댓글을 남긴 이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책주인아, 예전같이 돈을 받으면 감옥소에 보내 종신징역하게 될 터이니 조심해…”라고 해놓고 “좌편에 있는 ○○와 ××는 너와 네 어미와 △하는 거야”라는 음란한 그림까지 그렸습니다. 그 외에도 남자의 성기 옆에 나체의 책 주인 어머니를 그려놓고는 “이 물건은 세책점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쓴다거나, “네 딸년을 나한테 보내라”든지 하는 쌍욕을 해댄 낙서도 있습니다.

세책점(도서대여점) 주인의 부모까지 소환해 음란한 그림을 그린 망측한 낙서도 있다. / 이민희·유춘동 강원대 교수 제공

세책점(도서대여점) 주인의 부모까지 소환해 음란한 그림을 그린 망측한 낙서도 있다. / 이민희·유춘동 강원대 교수 제공

주인의 실명을 거명하고 비판하는 경우도 제법 됩니다. “임경삼아, 내용을 고치라고 몇 번을 말했느냐”거나 “장주영(張周泳) 마자(馬子)이고, 어견자(魚犬子) 잡종류(雜種類)”처럼 도서대여점 업자 이름(장주영)을 거론한 뒤 한글욕을 한자로 옮긴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도서대여비 시비가 붙어 “주인의 대가리(머리)가 구녁(구멍)이 뚫어지도록 두들겨서 붙잡혀 갔다”는 내용까지 기록한 낙서도 보이네요. 상대의 실명을 터는 것도 모자라 그 가족까지 들먹이며 성적인 욕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모양이 어쩌면 그렇게 요즘의 SNS 댓글과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당대 최고의 히트곡 ‘유산가’ 낙서한 사람을 욕한 댓글도 있습니다. 유치한 악플 릴레이라 할 수 있겠죠. “이것 쓴 사람은 개자식”이라든지 “이 글씨 쓴 자식은 개자식의 자손”이라든지 “만약 이 낙서를 보고 욕하는 놈은 내 아들이다”라든지 하는 식이죠.

이런 ‘악플’에 일침을 가하는 댓글도 있는데요. “무식하게 욕설을 기록하지 마시오. 그리고 지금 관민이 아사 지경인데 어찌 이야기책만 보시오”, “이 책에 욕설을 쓰거나 잡설을 쓰는 폐단이 있으면 벌금을 낼 것이니 이후로 깨끗이 보시고 보내주소.”

당대의 유행가를 끄적거린 경우도 꽤 됩니다. 그중 민속성악곡인 ‘유산가(遊山歌)’는 당대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것 같아요. 현전하는 90여종의 세책 중 20종에서 낙서가 보입니다. ‘유산가’는 봄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면서 봄구경을 권하는 노래입니다.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山川景槪)를 구경 가세…” 하는 내용입니다.

낙서나 댓글은 당대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일종의 쌍방간 의사소통이죠. 지독한 악플이 문제지만 그 역시 당대 사회의 민낯을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그 자체로 소중한 역사자료임이 틀림없습니다.

“잠자고 싶으면 한문책을 읽어라” 이 대목에서 궁금한 점이 생기죠. 당대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기에 책을 빌려주는 도서대여점까지 있었다는 말일까요. 18세기 중후반까지 올라가 볼까요. 잠을 청하려면 책, 그것도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죠.

낙서 중에는 책주인을 욕하는 댓글에 대해 다른 독자가 “이 글씨를 쓴 자식” 운운하며 악플 릴레이를 벌인 경우도 많다. / 유춘동 교수 제공

낙서 중에는 책주인을 욕하는 댓글에 대해 다른 독자가 “이 글씨를 쓴 자식” 운운하며 악플 릴레이를 벌인 경우도 많다. / 유춘동 교수 제공

그걸 실천한 이가 다름 아닌 영조 임금이었답니다. 야사가 아니라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 나와 있으니 엄연한 정사입니다. 1758년(영조 34년) 12월 19일의 일인데, 도제조 김상로(1702~?)가 밤잠을 설치던 영조에게 “제가 읽어주는 언문(한글) 소설책을 들으시면서 잠자리에 드시라”고 권했답니다.

그러자 영조는 “언문이 아니라 한문소설을 읽어야 잠이 올 것”이라고 민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전에 어떤 아낙이 아기가 울자 한문책으로 얼굴을 덮어주었다는 거야. 이웃집 사람이 ‘왜 하필 한문책이냐’고 물었더니 아낙은 말했네. ‘아이 아버지가 잠을 청할 때마다 한문책을 읽읍디다. 그래서 나도 이 애 애비처럼….”

영조는 그러면서 “이 말이 절묘하지 않은가. 한문책이야말로 사람을 잠들게 하는 거지”라며 크게 웃었다(大笑)고 합니다.

정조의 분서사건 이 일화는 조선 후기 소설 열풍을 소개할 때 양념으로 식탁에 올리는 메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조와 그의 아들인 사도세자(1735 ~1762)는 두분 다 ‘소설마니아’였습니다. 영조는 중국소설은 물론이고,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 한글소설을 즐겨 읽었고요.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불과 4일 전인 1762년(영조 38년) 윤5월 9일 <서유기>와 <수호지>, <삼국지> 등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중국소설회모본>의 서문을 썼답니다.

반면 문체반정의 기치를 든 정조(재위 1776~1800)는 소설을 민간의 잡담을 꾸민 거짓투성이라며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1737~1805)에게 “경박한 문체로 <열하일기>를 썼다”면서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고, 성균관 유생 이옥(1760~1815)의 과거(대과) 응시를 막기도 했답니다. 또 예문관 숙직 중에 <평산냉연> 등 중국소설을 본 서학교수 이상황(1763~1841)과 이조참의 김조순(1765~1832)을 파직하고 이른바 불온서적을 불살라버렸답니다. 그들이 보았다는 <평산냉연>은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남녀의 결혼과정을 묘사한 청나라 통속소설입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 이 일화들은 무엇을 일러줄까요. 다른 분도 아닌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분서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조선에 소설 열풍이 불었다는 얘기죠. 당시 서울거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후유증을 딛고, 기상이변에 따른 전염병 창궐에서 겨우 벗어나 한숨을 돌렸습니다. 여기에 18세기 초 대동법의 확대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게 되자 큰 변화가 일어났고요.

<홍길동전>, <춘향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등의 고소설이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근대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더 많이 읽히고 팔렸다.

<홍길동전>, <춘향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등의 고소설이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근대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더 많이 읽히고 팔렸다.

조정에서는 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됐죠. 그러다 보니 시장이 활발해졌고,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 수공업이 활발해졌고요.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된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돌았고, 저잣거리 문화가 꽃피게 됐답니다.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던 책은 중인과 평민의 벗이 됐고요.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한글소설이 창작되기 시작하죠. 그래도 일반 백성이 책을 사보기에는 너무 비쌌죠.

그래서 중국에서 수입되는 책을 유통하는 책쾌(서적 중개인)와 책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전기수(傳奇?)와 같은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는데요. 전기수는 청계천 주변을 하루씩 한달 단위로 돌며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당시 전기수는 배우톤의 연기와 대사로 청중을 사로잡았답니다. 조수삼(1762~1849)의 <추재집>에 흥미진진한 내용이 나옵니다.

전기수는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연기톤으로 책을 읽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면 갑자기 대사를 멈추고 뜸을 잔뜩 들였답니다. 애가 단 청중이 돈을 던지면 그제야 대사를 이어갔다는데요. 비극도 일어났습니다. 소설 <임경업전>에서 임경업 장군이 역적 김자점의 무고로 목숨을 잃는 장면을 읽고 있던 전기수가 구경꾼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임경업 장군이 실의에 빠지는 연기가 너무 실감 나서 벌어진 어이없는 살인사건이었던 셈이죠(이덕무의 <아정유고>, <일성록> 1790년 8월 16일자).

인기 있는 전기수는 부잣집 여인들의 부름을 받아 여장을 하고 여자 목소리를 내며 양반집 안채를 드나들었다는데, 이때 안방마님과 전기수가 눈이 맞은 게 들통나 포도대장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도 일어났답니다.

“책 빌리려고 가산 탕진?” 깨끗이 베낀 책을 빌려주는 ‘조선판 도서대여점’도 탄생했습니다. 세책점은 당대 불어닥친 소설 열풍을 타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문제로 비화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부녀자들이 소설에 흠뻑 빠졌다는 건데요. 책은 보고 싶은데, 빌릴 돈은 없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녀자들이 비녀나 팔찌를 맡기거나 팔아, 혹은 빚까지 내서 책을 대여하는 통에 가산을 탕진할 정도였다는 겁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부녀자들이 투기와 음란한 내용이 대부분인 소설에 정신이 팔려 있다”면서 “부인들의 방탕함과 방자함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비판합니다. 일본인 오카쿠라 요시자부로(岡倉由三郞·1865~1935)는 “조선에서는 냄비, 솥 등을 맡기고 책을 빌리며, 요금은 2~3일 기한에 권당 2~3리 정도”(<조선의 문학>)라고 했고,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1865~1935)은 “세책점은 10분의 1~2문에 빌려주는데, 돈이나 화로 혹은 솥을 담보로 요구한다”고 기록했습니다.

당대 서울의 세책점은 30곳이 넘었다는데요. 육당 최남선(1890~1957)도 “골방에 갇혀 지내던 부인네들에게 달 밝고 별 깜박거리는 시원한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 실로 이 소설의 세계였다”고 소개했습니다.

당대의 베스트셀러 그렇다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이었을까요. <삼국지>나 <수호지> 등 중국소설의 번역물은 스테디셀러였죠. 그러나 베스트셀러 한글창작소설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윤하정삼문취록>(186책) 같은 100책 이상의 대하소설과 <옥루몽>(30책) 같은 20책 이상의 장편소설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물론 <춘향전>, <홍길동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임경업전>, <숙영낭자전>, <심청전>, <여장군전> 등도 베스트셀러였죠. 당대 꼬장꼬장한 사대부 남성들도 앞에서는 눈살을 찌푸리는 척하면서 뒤돌아서서는 이른바 통속소설을 탐독하며 웃고 울었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홍길동전>, <춘향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같은 고소설이 이광수(1892~1950)나 김동인(1900~1951) 같은 근대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훨씬 더 많이 읽히고 팔렸다는 사실입니다. 위로는 영조 임금부터 즐겨 찾았고, 아래로는 안방의 여인네들까지 가재도구를 탕진하면서까지 빌려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기환 역사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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