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탈출하고 싶은 수컷들의 ‘위계’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
2021.10.11

평생의 목표는 온전히 평등한 조직에서 일하는 겁니다. 나이와 연공, 직책에 따른 위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공동체에 속한 모두 간 수평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을 꿈꿉니다. 그런 조직 안에서라면 누구도 갈등을 회피하거나 억누르지 못할 겁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감옥세계에서는 ‘법무부의 시계는 국방부 시계와 같다’라는 격언이 대대로 구전됩니다. 나이에 따른 위계는 작동을 멈추고, 죄수도 군인처럼 조직에서 보낸 시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는 교훈이 담겼습니다. 폭력을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군대의 권위주의를 거부한 내가 들어온 세계에는 신념을 지킬 공간 따위가 없다는 메아리가 매일 울려퍼집니다. 죄수들은 감옥생활에서 병영문화와 닮은 점을 찾아내 각자의 과거를 추억합니다.

군대식 위계를 경험한 건 처음이 아닙니다. 교도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불시에 소지품을 검사받고, 줄 맞춰 앉거나 서서 대화가 아닌 훈화를 드는 건 학창시절 12년간 지겹도록 겪었습니다. 오히려 체벌이 없다는 점에서 감옥의 규율이 견딜 만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찾은 예술학교에서의 경험도 지금과 유사합니다. 신입생이 처음으로 학교에 모인 날, 건물 입구를 폐쇄하고 모든 사람을 일렬로 세워 윽박지르며 선배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던 이들은 순진했던 기대를 산산조각냈습니다. 1년 내내 시도 때도 없는 집합에 임하고, 과복과 명찰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선배를 발견하는 즉시 관등성명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몰상식한 규율에 목숨 건 이들은 남성 군필자였고, 거부하고 맞서려는 내게 번번이 연대책임을 묻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폭력을 수용해야 했던 생활이 끝나자마자 폭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었습니다. 폭력의 굴레를 끊어야 한다는 내 목소리는 다음 차례를 이어받은 남성 군필자에 의해 무시됐고, 교수 집단이 규율에 묵인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새겨진 상처가 나를 병역거부자로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감옥세계에서 다시 굳건한 위계를 마주하며 위태로워졌습니다. 서열의 꼴찌인 처음이 편했습니다. 작업장에서는 화장실 청소를 전담하고, 방에서는 후미진 자리를 배정받는 불편함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하대하도록 요구받는 상황을 직면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나이도, 서열도 높은 이를 깍듯이 ‘형님’으로 대하며 성실히 청소하는 ‘막내’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나보다 먼저 들어온 죄수들이 대부분 출소했습니다. 궂은 업무에서 벗어나 조금 덜 불편한 자리를 쓰게 됐습니다. 비교적 단기간에 승급한 나를 두고 하나같이 운을 타고났다는 덕담을 건넵니다. 곧 작업반장이 될 수도 있답니다. 아직도 나보다 늦게 자리 잡은 이들을 대하는 법을 모르겠는데, 큰일입니다. 우선 바깥세계에서 그랬듯, 상대의 나이와 서열을 고려하지 않고 존대하기로 했습니다. 서열에 따라 일을 배분하는 질서를 흩트렸습니다. 서열에 의한 권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파악하자마자 나이로 위계를 뒤집으려는 죄수들에게 할 말을 잃었습니다. 고참 노릇에 취한 몇몇은 나에게 기강을 무너뜨리지 말라며 하던 일을 빼앗습니다. 도저히 수컷 사회를 이해할 수 없어 관계를 회피합니다. 홀로 감옥의 담장만큼 높은 벽을 쌓고 지냅니다.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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