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동-SNS 맛집은 몰라도 ‘주민 맛집’은 있어요

김천 자유기고가
2021.10.04

서울지하철 5호선 목동역에서 나와 북쪽과 서쪽으로 쭉 이어지는 길을 따라 신정동이 있다. 신정동은 1동에서 7동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동네라 신정역과 2호선 지선인 양천구청역과 신정네거리역이 모두 그 안에 있다. 양천구에서 가장 오래된 뿌리를 가진 마을이다. 신정역에는 20세기 초에 찍은 신정동 그러니까 당시 은행정의 사진이 걸려 있다. 지금과 달리 평지 대부분은 논과 밭이었고, 산자락을 따라 마을이 들어선 모습이 예스럽다. 지금도 신정동 대부분은 구릉을 따라 이어져 골목을 걸으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이어져 있다.

신정동은 서울의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신정동은 서울의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칼산 비탈에서 최근 구석기 유물과 유적지가 발굴된 것을 빼면 옛 흔적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간간이 60년대쯤 지어진 1층과 2층 벽돌집이 보이고, 다시 70년대에 유행했던 3층짜리 다세대주택이 골목 어느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아주 근래에 지은 5층짜리 공동주택들은 한참 새집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골목에서 만난 주민들은 대체로 오래도록 이 마을을 지키고 살고 있다. 노인들이 자주 보이고, 그들의 손주인 아이들이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늦은 오후 노란색 승합차들이 골목에 들어서면 길목 길목에 노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학원이거나 태권도장을 마친 아이들을 맞이한다. 태권도장 사범은 노인들과도 친한 듯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아이를 넘겨주고 “밥 많이 먹어라”는 당부를 크게 외친다.

오래된 마을 가게들

골목 안에는 이런저런 마을 가게들이 있다. 큰길가를 제외하면 편의점은 보기 어려웠고, 구멍가게보다는 약간 큰 식품점들이 활발히 문을 열고 있다. 골목 안 교차로마다 요즘 흔한 아이스크림 과자 무인 판매점을 자주 만날 수 있다.

2대 3대가 함께 걷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2대 3대가 함께 걷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갖가지 학원에 다니느라 어른보다 더 바쁘다는데 어쩐지 이곳 아이들은 뭉쳐 뛰어다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다만 팬데믹의 영향으로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은 적고, 골목마다 노인들이 앉아 무언가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오후 시간 골목의 주인은 아이들과 그들의 할머니들이다.

신정동의 일부에 목동아파트가 있다. 때문에 개발업자들은 신정동에 새로 아파트나 공동주택을 지을 때 신목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목동에서 따온 정체불명의 신트리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목동역을 경계로 아파트단지와 신정동 골목은 확연히 선을 긋고 있다.

골목에서 만난 노인은 “개발 이야기도 없지는 않은데 우리야 살면 얼마나 산다고 새집 타령이겠나? 우리 가고 아이들이나 새집 지어 살면 좋겠지” 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인근 갈산지역이 도시개발구역으로 선포되고 이런저런 개발계획들이 있기는 한데 신정동 토박이 노인들은 그것도 저것도 귀찮다고 했다. 개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들고뛰는 집값도 불편하다는 것이다. 한곳에서 살아온 익숙함이 생활에는 더 편할 수도 있겠다 싶다.

신정동 골목은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주민을 위한 편의시설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래된 세탁소, 이발소, 미용실, 철물가게와 식품점. 간간이 1층에 자리 잡은 가내공장과 창고. 그리고 집과 집이 이어진다.

길가 쪽으로 나와 큰길과 이어진 샛길에는 신정동 주민들에게 나름 유명한 가게도 볼 수 있다. 14년 동안 멜론빵만 연구했다는 동네 빵집에는 다 팔린 빵도 여럿 있다. 가격이 녹록지 않은데도 손님들은 쉽게 지갑을 연다. “왜 하필 멜론빵이냐”고 묻자 “멜론빵 만드는 걸 배웠는데 우리나라에는 전문점이 없어 시작했다”라고 한다.

골목 군데군데 과일 상점도 보인다. 가게 주인은 “올해는 햇빛이 좋아 과일들이 다 맛있다. 추석 앞두고 신고배가 크고 단데 가격도 좋다”고 했다. 동네가게인데도 진열된 과일들이 상당히 고급스럽고 판매도 그럭저럭 잘 된단다.

구릉지대를 따라 골목길은 오르막과 내리막길로 이어지고 있다.

구릉지대를 따라 골목길은 오르막과 내리막길로 이어지고 있다.

목동역을 나서면 도로를 따라 옷가게와 식당들이 줄이어 있다. 목동 로데오 패션거리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사람들에게는 긴 이름보다 신정동 먹자골목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식당들은 아무래도 위축된 분위기가 없지 않았지만, 늦은 오후 시간에도 둘셋씩 모여 이른 술판을 벌인 모습도 볼 수 있다. 횟집 주인은 “아무래도 손님이 줄었다. 예전에 비해 반이나 되려나. 그래도 요즘은 좀 늘어난 편이다”라며 골목 분위기를 전한다.

골목에 옷이 걸린 행거를 내놓고 손님과 대화하던 옷가게 주인은 “식당보다는 옷가게들이 더 타격을 입은 것 같다. 먹는 거야 어째도 먹어야 하지만 옷은 경기 차이가 크다”라고 했다. 그래도 시내 중심가에 비해 임대 표지를 붙인 가게가 적고, 공실도 대개는 볼 수 없다. 신정동은 꾸준히 버티고 있어 서민들의 생존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곳곳에 교육시설과 노인병원

노년층이 많은 것은 노인전문병원이 흔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골목 안에도 낮시간 노인들을 돌보는 데이케어센터와 비교적 큰 규모의 치매노인돌봄센터를 찾아볼 수 있다. 일생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다가 늙고 쇠약해져도 손주라도 돌볼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 손주까지 다 커서 곁을 떠나면 골목길에 앉아 서로가 빛나던 옛 시절만을 반추하며 시간을 소모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병이라도 덜컥 걸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신정동과 목동 일대의 교육열을 보여주듯 각종 학원과 스터디 카페가 많다.

신정동과 목동 일대의 교육열을 보여주듯 각종 학원과 스터디 카페가 많다.

신정동은 전체적으로 구획정리가 잘 이루어진 곳이라 대부분의 골목길은 반듯하다. 구부러진 곳도 없고 골목은 반듯반듯 직각으로 만나 큰길로 이어진다. 대충 따라가도 길 잃을 일은 없는 것 같다. 가게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다 말참견을 하던 노인은 “여기도 집값이 많이 뛰었다. 10년 전보다 배는 뛴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은 싼 물건이 여럿 있다. 내 집 갖기가 다른 데보다는 좀 수월하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업자의 말로는 신축 공동주택들은 그럭저럭 매기가 있으나 오래된 다세대주택들은 물건이 많이 밀려 있다고 했다.

양천구 일부 지역이 주거지로서 인기가 적은 것은 인근의 김포공항 때문이다. 항공기 이착륙 소음으로 민원이 많은 곳이다. 신정동은 그 소음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방향이 맞으면 골목에서도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볼 수 있다. 신정동에서 볼 수 있는 비행기들은 크고 낮게 날아간다.

길가에서 마주친 동네병원 직원은 “주택가라서 동네 맛집은 별로 없다. 그래도 간간이 주민들에게 소문난 집은 있다”라고 했다. 그가 알려준 곳은 메밀국수 전문점이었는데, 소문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가게 종업원은 “여기는 외부에서 일부러 찾아오기가 쉽지 않다. 그저 동네 사람들이나 알고 마는 정도다. 이 동네 식당 대부분이 동네장사 전문이다”라고 했다.

골목상권은 비교적 활발한 모습이다.

골목상권은 비교적 활발한 모습이다.

신정동에는 초등학교 15개, 여중을 포함해 중학교 4개, 고등학교 7개가 있어 교육시설도 비교적 잘돼 있는 셈이다. 게다가 대치동에 비길 만큼 유명한 목동 학원가와 맞닿아 있어 주민들의 교육열도 높은 편이다.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예전의 독서실이 스터디 카페로 변신해 성업 중이다. 지하철 목동역에 가까울수록 학원도 많이 보인다. 대부분은 서울대 입시를 목표로 한다는데 현실도 그와 같기를 바란다. 신정동 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투자도 적지 않아 보인다.

신정동은 동네 규모에 비해 전통시장이 거의 없다. 목동의 대형마트가 상권의 중심 역할을 한다. 역 근처에는 중형 마트들이 없는 것 없이 팔고 있다. 마트 종업원은 “노인네들 말고는 죄다 일 나가고 퇴근길에 잠깐 필요한 것 사가니까 그다지 불편은 없다”고 전했다.

신정동 먹자골목은 팬데믹의 여파가 큰 곳이다.

신정동 먹자골목은 팬데믹의 여파가 큰 곳이다.

‘가족의 삶’이 남아 있는 곳

워낙에 광범위한 동네라 마을 주민들의 삶은 천지 차이로 다양해 보였다. 아파트단지도 있고 공동주택이 밀집한 지역도 있어 그 차이의 벽은 보이진 않지만, 골목 안 삶을 다르게 만든다는 점은 분명했다. 목동역과 신정역 주변의 골목은 소박하고 한가롭지만, 목동아파트단지 쪽으로 가면 골목도 번잡하고 차량 통행이 많다. 하긴 집값의 차이로 등고선처럼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시대가 됐으니 골목 안 삶의 모습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골목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느 골목이나 색깔과 모습이 다른 것은 그곳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정동 골목은 우리 시대 서민들과 중산층의 삶의 형식이 남아 있다. 도시 대부분에서 사라지고 있는 3대가 함께 사는 세대들을 신정동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귀가하는 어린 학생을 기다렸다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신정동에서는 아직까지도 흔한 모습이다. 아이들은 그날 있었던 화나고 즐거운 일을 재잘거리며 고해바치고 할머니는 “그래, 그래” 하며 공감한다. 신정동 골목을 걸으면 작지만 자기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학원과 스터디 카페는 많아 자식들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가길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도 볼 수 있다.

골목 안에서 군데군데 터를 잡고 손님과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과일가게 주인도 있고, 자부심 가득한 빵집 주인도 골목에 있다. 좋은 마을은 어떤 곳일까 곰곰이 짚어보면 교육시설과 교통, 시장 등 생활 편의시설 등을 꼽을 수 있지만 어쩌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이 더 클 수도 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며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천국일 것이다. 신정동 골목엔 적어도 가족의 삶이 남아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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