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이재용을 ‘일찍’ 떠나보내며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
2021.09.13

그를 처음 만난 건 작업장을 지정받고 청소를 시작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 묵례하며 지나는 무리의 틈에 끼어 있었다고 해야겠죠. 그는 바깥 세계에서 뉴스로 접했던 것보다 약간 야위었지만, 재벌총수로서 지녔던 근엄한 표정은 제법 옅어져 있었습니다. 여유가 넘치는 그의 걸음걸이는 나를 한참 사로잡고 있었던 긴장감을 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감옥생활을 걱정하는 가족에게 “박근혜와 이재용도 지내는 곳”이라며 안심시켰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나와 같은 무리에 속한 죄수들은 하나같이 ‘살면서 언제 저렇게 대단한 사람을 코앞에서 보겠냐’ 따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후에도 그를 숱하게 마주쳤고, 언젠가부터 그가 거의 매일 심리치료실인지 수사접견실인지 알 수 없는 곳을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존재를 신성하게 여기는 무리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광복절을 앞두고 8월 13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가석방돼 나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광복절을 앞두고 8월 13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가석방돼 나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그의 재판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건 한국사회를 뒤흔든 거대한 비리와 관련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 재판과 한달 남짓의 터울을 두고 형이 선고됐기 때문입니다. 그와 비슷한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나 비관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어렴풋이 계산해보니 그의 출소일은 나와 한두달 차이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이곳을 떠났습니다. 몇달 전부터 그가 석방될 기미가 있긴 했습니다. 몇몇 경제사범은 그가 특별사면되기를 내심 기대했습니다. 죄명과 형량이 비슷하기에 자신도 구제될 가능성이 희박하게나마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면이 아니면 나갈 길이 없어 보였던 그는 놀랍게도 가석방됐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이번 결정을 두고 “이재용을 위한 가석방이 아니다”라며 입장을 밝힌 것은 수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뒤이어 장관이 취업제한 규정을 그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한 것이 논란을 증폭시켰습니다. 재벌총수만을 위한 특혜로 비치지 않기 위한 교정 당국의 앞선 노력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7월 가석방 심사부터 형기의 70%가 경과한 수용자가 대상에 포함된 것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흉악 범죄자가 아닌 이상 형기의 75~80%를 채운 수용자가 가석방 대상자로 선정된 것을 고려하면 분명한 진전이었습니다. 8월 심사에서는 기준이 보다 완화돼서 이재용뿐만 아니라 형기의 60%가 지난 수용자가 대거 출소했습니다. 사면 발표가 없어 실망했던 죄수들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법무부 장관은 왜 감옥 인권 향상을 위해 가석방제도를 개선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는지. 삼성그룹의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암묵적인 거래 조건이었다는 추측도 나오지만, 정치적 이득이 없기 때문에 수용자의 인권을 강조할 수 없었으리라 짐작할 뿐입니다. 배경이 어떻든 감옥 세계에서는 8월에 실시된 ‘이재용 룰’이 앞으로도 유효할지 모두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죄수들은 재벌 총수만을 위한 특별사면을 반대할 논거나 명분이 없다는 패배주의적 태도에 빠져 있었으나, 가석방 기준의 완화에 대해서는 권리의식을 일깨워 예외란 있을 수 없다며 입을 모읍니다. 혹자는 가석방 조치를 사면과 동일시하며 비판하지만, 다행히 9월에도 완화된 기준이 유지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재용을 위한 제도 개선이었다 해도 모처럼 찾아온 자유권 진전의 기회를 헛되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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