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홀>은 몽골 역사 아닌 나의 창작물”
“좋게 봐주셔서 그럴 뿐이지”, “에라이 이 정도밖에 못 그리나 싶었어.” 현재 웹툰 <몽홀>을 연재 중인 장태산 작가(69·본명 장태원)는 인터뷰 내내 손사래를 쳤다. ‘작화로는 최고봉’이라는 한국만화계 안팎의 평가를 그대로 전했을 뿐인데 자신은 그에 못 미친다는 반응이 일관되게 나왔다. 웹툰판의 젊은 작가들을 압도하는 그의 작화는 칠순을 코앞에 두고 오히려 더 깊은 내공을 뽐낸다. 작품에 공을 들이는 만큼 ‘워라밸’은 뒷전인 그의 작가정신은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작업실 풍경에서도 묻어나왔다. 창작과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만 단출하게 채워둔 채 자신만의 세계를 매주 탄생시키고 있는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내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 주간의 작업을 마감한 뒤 짧게 숨을 돌리던 6월 25일, ‘장태산표’ 만화의 기원부터 현재까지에 대해 들어봤다.
-오랫동안 펜으로 그리다가 컴퓨터로 작업하는 데 적응하기가 어렵진 않았나.
“컴퓨터는 <몽홀>을 연재하기 전부터 더듬더듬 배우기 시작했다. 1년 이상은 태블릿 유리판 위에 그리려니 미끄러져 적응을 잘 못 했지. 주변에서 도와준 젊은 작가들 아니었으면 아예 못했을 일이야. 그래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효과를 내는 건 내 입맛에 안 맞아 안 쓰고 있다. 나름대로 예쁘게 효과가 나오긴 하는데 젊은 작가들 그림체엔 어울려도 내 그림에는 안 어울리더라.”
-<몽홀>을 처음 구상한 것은 언제부터였나.
“연재 시작할 때는 구상을 다 짜놓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막연하게 아이디어만 있던 상태였다. 50여년 전, 그러니까 내가 열 살쯤 되던 어릴 때 존 웨인이 나오는 <칭기즈칸> 영화를 본 적이 있어. 그 어릴 적에 뭔가 감명 같은 걸 받았나 봐. 막연하게 나도 나중에 언젠가는 테무친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야지,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신문 연재할 때는 이 이야기를 만화화할 기회가 없다가 오히려 종이만화가 한물가니까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2015년 <몽홀> 연재를 네이버웹툰에 시작했는데 웹툰이 처음이었으니 시행착오도 겪었을 것 같다.
“처음엔 예전 출판만화처럼 만화 컷을 짜 그렸다. 40년 넘게 종이에 만화를 그렸고, 또 아무래도 책으로 내는 게 최종 목표다 보니 그랬어. 지금도 초기 연재분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웹툰의 세로 스크롤 방식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해서 그냥 잘라붙이면 되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더라. 스크롤 형식에 맞는 연출이 따로 필요한 거였어. 그래서 그뒤부터는 스크롤에 맞춰서 콘티를 짜기 시작했지.”
-그래도 시작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특히 선의 강약을 살린 특유의 작화를 보며 댓글이 모두 감탄 일색이었다.
“1년치 분량이 되는 원고를 미리 그려 세이브를 해두고 연재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 모니터로 웹툰을 보는 게 일반적이었어.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스마트폰으로 보는 독자들이 훨씬 많아졌어. 작은 화면으로 만화를 보니까 이전까지 큰 화면에서는 잘 보이던 세세한 선들이 독자 입장에서 복잡하게만 보이게 되는 한계가 있더라. 그래서 반응이 안 좋아졌어. 난 처음엔 그걸 모르고 ‘왜들 그러지’ 하고 의문을 가지다가 뒤늦게 문제를 알고 미리 해놨던 원고들을 다시 손봤다.”
-원로급으로 인정받을 나이에 웹툰의 문법에 맞게 적응하려는 노력이 이채롭다.
“원래는 대사도 극도로 자제해 최소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점도 스마트폰 세대에 맞춰 약간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독자들은 웹툰을 휙휙 빠르게 넘기며 보는 추세라 대사가 없으면 이해를 못 하고 지나가는 한계가 있더라. 독자에게 전달하는 실력이 부족한 건 나의 문제니까 지금도 고민 중이다. 그래서 댓글도 보려고 애를 쓴다. 후배들은 선배 속을 생각해서인지 좋은 말만 해주고, 그나마 독자 의도를 알아차리려면 댓글밖에 없으니.”
-<몽홀>은 실제 몽골 역사 이야기를 그린 게 아니라 작가의 창작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기본 이야기 얼개는 실제 역사와 비슷한 흐름도 보인다.
“사실 나는 테무친이란 인물을 빙자해 척박한 몽골 초원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의 감수성을 다루고 싶었다. 우리의 사고로는 이질감을 느끼는 지점들을 꺼냈지.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데리고 간다든가 하는 문화는 한국의 정서로 보면 욕먹기 딱 좋다. 그야말로 야만의 극치인 셈이지. 그런데 그런 문화가 비난만 받을 일인가 하는 물음을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극한의 환경에 떨어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예상 밖의 반전도 가미하면서 실제 역사와 다르게 각색은 했다. 그래도 이야기 흐름은 역사적 사건과 맞물리기도 하지. 그러니 아직 완결까진 멀었다.”
-한컷 그리는 데만도 길게는 10시간도 걸릴 정도로 공을 들여 작화하는데 연재 일정에 쫓기진 않나.
“힘들기도 한데 재미도 있어. 재미있으니까 할 수 있지, 뭐하러 이걸 하나 하는 마음이면 못했을 테니까. 또 처음부터 이 작품은 장편으로선 이게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혼자 다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그러니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세상에 뭐가 있어도 내 시간이란 거의 없다. 원고 넘긴 다음날 금요일 하루 하품 좀 해가며 다시 스토리 구상하기 시작하지.”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나.
“초등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만화가가 되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다. 애들이 보통 그러듯이 꼼지락거리면서 장난삼아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약간의 소질은 있었나봐. 특히 <요술소년>이라는 일본 만화영화를 당시 남산 대한극장에서 단체관람한 적이 있어. 그거 보고 반해서 상영이 끝난 뒤 화장실에 숨어 있다 나와 하루종일 보고 또 본 기억이 나네. 만화가 문하생으로 들어간 건 열여섯 살쯤인가. 집안형편이 안 좋아 학교도 못 다니고 이것저것 알바식으로 생활전선을 돌다가 ‘에잇 나도 만화 그려보자’ 하는 마음에 문하생 자리를 찾아 들어갔지.”
-문하생 시절이 지금의 작화실력을 갖추게 된 밑거름이 됐나.
“우리 땐 문하생 생활을 많이 했어. 나이도 어렸지만 배우겠다고 가도 써주는 데가 없으니 나오라고 하는 곳이면 따지지 않고 가는 거야. 그러니 10년 넘게, 아니 평생을 자기 작품 못 내는 사람도 많았지. 처음엔 잡일이나 하고 기본 선이나 치는 것부터 시작했어. 직선을 그을 때 인위적인 맛이 나면 안 되니까 자를 대지 말고 손으로 치라는 고집스러운 선생 밑에서 달달 떨면서 배웠다. 그림도 다른 식으로 그리면 야단맞으니까 선생 그림 그대로 따라가야 해. 그렇게 이 선생 저 선생 그림 따라하면서 내 화풍은 다시 만들어야 했지. 여러 그림체 따라 그리다 보니 내공까진 아니지만 맷집은 생겼다고 할까.”
-과거 대표작 중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스카이 레슬러>를 추억으로 회자하는 이들도 많다.
“당시 만화잡지 ‘점프’에서 느닷없이 연락이 와 프로레슬링 만화를 그려달래. 그 무렵이 AFKN에서 미국 WWE 방영하면서 인기 끌던 시절이었거든. 사실 난 이전까지 프로레슬링에 크게 관심은 없어 못 한다고 했어. 그러다 여차저차 하긴 하게 됐어. WWE에 나오는 유명 레슬러들을 모델로 해서 캐릭터 넣고 주인공은 한국인이어야 하니 유백만 캐릭터를 넣었지. 처음으로 스토리를 쓰는 작가 후배까지 둬가며 시작했어. 연재 초기 4~5회 정도는 그렇게 갔는데, 하루는 문하생이 <스카이 레슬러>가 일본 만화 <타이거 마스크>를 베낀 거란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 거야. ‘이런, 난 그 만화 보지도 못했는데 뭔 소리야’ 했지. 그리고 나서 <타이거 마스크>를 봤더니 진짜 도입부가 비슷해. 그래서 스토리 작가 불러서 물어보니 ‘조금 참조했다’ 이러더라고. 그 소리 듣고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나도 아예 연재 안 하려고 했어. 그러던 걸 편집장이 사정사정해서 다음 화부터는 완전히 내 이야기로 그리기로 방향을 틀어버렸지.”
-또 다른 대표작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는 복간될 정도로 여전히 찾는 독자들이 많더라.
“종이만화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부수가 줄어 그나마 복간이나 가능하지 신간 내는 건 어렵다. <몽홀>도 향후 책으로 내려는데 사실 출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인기 있다는 건 그렇게 좋게 봐주셔서 그럴 뿐이지. 수입만으로 보면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나 <스카이 레슬러>로 돈은 가장 많이 벌었지만 사실 액션 만화가 내 성향에 잘 맞는 건 아니었다. 먹고살 돈 벌려고 그린 작품도 없지 않다.”
-그럼 기억에 더 많이 남는 작품이 따로 있나.
“주로 단편집이 기억에 남는다. <빈 들에 서다>나 <도시의 이력서> 같은 작품. 잘 안 된 자식이 더 마음 쓰이는 그런 심정이랄까. 작가로서 하고 싶은 작품은 인기가 높지 않고 시류에 맞춰 낸 기획작이 더 유명해졌지. 현실과 괴리감을 느낀 부분이다. <몽홀>은 반응이 별로라도 그런 거 상관없이 그릴 수 있어 다행이다. 네이버웹툰 대표가 <몽홀>을 보더니 ‘선생님 인기는 없겠습니다’ 그러대(웃음). ‘그래도 선생님 색깔 지키는 게 좋겠다’ 하는 걸 보면 네이버가 늙은 애도 구색 맞추기로 껴주자는 생각인 듯해. 그래도 난 나름대로 60년 만화계 생활 정리하는 차원에서 완결시키면 좋으니까.”
-차기작으로 미리 구상해두고 있는 이야기도 있나.
“우선 <몽홀>을 끝내는 게 최우선 목표다. 이후에도 만화를 그릴 수 있다면 만화계 잔혹사 생활이라고 부르면 되려나, 힘들었던 지난 시절 옛이야기를 순전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그려보고 싶긴 하다. 예전 선배들은 자식이 학교에서 가정조사할 때 부모님 직업 쓰는 난에 만화가라 쓰면 손가락질받으니까 고민하다가 ‘상업미술’ 이렇게 썼거든. 그러고선 씁쓸하게 ‘태원아, 소주 한병 사와라’ 이랬다고. 물론 그것 말고도 유쾌하고 즐거웠던 추억도 함께 담고 싶기도 하고.”
-현역 웹툰 연재 작가 중에선 최고령 축에 드는데 건강에는 문제가 없나.
“몇년 전에는 당뇨가 와서 몸무게가 50㎏까지 빠지기도 했다. 일어날 때마다 휘청거렸지. 현세가 주치의처럼 조언해줘서 이젠 괜찮아졌다. 이현세, 이희재 다 50년지기 친구다. 죽이 잘 맞아 예전에 술 마실 땐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마시곤 했다만 요즘은 조금만 먹어도 못 견디겠다. 작업도 밤새워 일하는 건 못해. 집은 서울에 있지만 여기 부천 작업실에서만 지내는 것도 작업실에 출퇴근을 하면 시간 없어서 마감을 못 하니 그런 거다. 그래서 꼬라지가 이래(웃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