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들어왔고 또 듣는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인생은 투쟁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우는 것인지 늘 모호하다. 문명사는 제국과 제국, 열강들이 전쟁을 벌여온 전사가 많고, 인생이 투쟁이라는 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이라는 것일까? 때로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싸우고 극복하라는 조언도 나온다. 이렇게 호전적이어서야.
물론 국가적 차원이든 기업 간 경쟁이든, 개인의 문제이든 시기와 상황마다 싸움의 양상은 다를 것이니 투쟁의 목적도, 적도 변화할 수 있다. 이 모호함을 간단히 답하고 정리해보자. 인간이 벌이는 모든 투쟁은 ‘죽음’에 맞선 싸움이다. 모름지기 투쟁은 살고자 하는 투쟁이다. 따라서 생략된 단어를 추가하면 바로 ‘생존투쟁’인 것이다. 생존해야 발전도 하고 성공도 한다. 죽으면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할 것도 없을 테니까.
지난 1년 넘게 인류가 벌이고 있는 가장 큰 투쟁을 생각해보자. 주적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이고, 이 무서운 적은 자기도 살겠다고 인간에 비해 엄청난 속도로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전시켜온 지식과 과학의 최고 공력을 쏟아 백신을 만들어내고 이를 사람들이 접종해가고 있다.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전쟁의 논리는 간단하다. 사람이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하지 않도록 하는, 결국 더 많은 사람을 살려내기 위한 전 지구적 인간연대의 총력전이다.
우리는 자기방어를 위해 첨단과학을 개발해왔고, 의학기술을 고도화해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연장하기 위해 투자하고 노력해왔다. 장기를 이식하고, 인공생체를 만들고, 줄기세포를 연구하며 생명의 신비를 파헤쳐 불치병을 없애고, 암을 정복하고, 위험한 병균과 바이러스를 통제해 살아남고자 투쟁해왔다.
그런데.
인간인 이들이, 우리의 일부가, 우리 가족이 길을 나섰다가 버스 안에서 건물이 무너져 죽는다. 청소하다가 넘어진 300kg 쇠날개에 깔려 목숨을 잃는다. 화재 속으로 사람을 구하러 뛰어들었다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도 있다. 이렇게 일상을 살다가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전투지역이 아니라 생활구역에서 허망하게 죽는다. 새우튀김을 팔았던 가게 사장이 블랙컨슈머의 끊임없는 불만을 전달하는 플랫폼 업체의 기계적인 전화를 붙든 채 뇌출혈로 쓰러져 허망하게 생명을 잃는다. 가가호호 즐거운 택배를 배달하는 기사들이 과로로 쓰러져 가족의 곁을 영영 떠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참 이상하지 않은가? 정규군이 전선에 집중해 밀고 내려오는 적을 죽도록 막아서고 있는데 정작 이들이 지켜내고 있는 후방의 시민이 보이지 않는 연쇄살인마의 광기 앞에 픽픽 쓰러져 가는 공포영화처럼 어이없지 않은가?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야 하는 우리 인간의 생명은 재난 재해로부터도, 과로로부터도, 갑질 스트레스로부터도, 나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이기적 탐욕으로부터도 지켜져야 한다. 인류의 투쟁은 죽음과의 싸움이다. ‘생존’ 투쟁인 것이다.
<최영일 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 이사·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