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동이> 만화가 이희재

김태훈 기자
2021.07.05

“전두환 시대엔 아동만화만 그릴 수 있었죠”

섬에서 자란 소년은 열 살이 돼서야 읍내에서 처음으로 만화라는 신세계를 만났다. 그때부터 만화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펜을 놓고 만화판 주변을 떠돌던 짧지 않은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만화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독보적인 ‘리얼리즘’ 만화의 영역을 개척한 작가로 첫 손에 꼽히게 됐다. <악동이>와 <간판스타>, <나 어릴 적에>, <이희재 삼국지> 등 다양한 주제의 만화를 선보이면서도 자신만의 사실적인 색깔만은 놓지 않았던 이희재 만화가(68)를 6월 2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경직된 시대 검열과 심의에 시달리는 동안 더욱 만화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며 작가로서의 예술적 사명과 조화시키려 애쓴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었다.

사진/김창길 기자

사진/김창길 기자

-최근 사마천의 <사기>를 만화화한 작업이 끝났다던데.

“2014년 처음 시작할 때는 2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이하 <사기>)를 7권으로 완결하는 데 7년이나 걸렸다. 만화 원고는 모두 지난달 출판사에 넘겼고, 이제 후기만 남았다. 많은 독자가 볼 수 있도록 웹툰으로 하려 했는데 출판사 권유로 책으로 냈다. 또 이왕이면 한지에다 붓과 먹으로 그리고 싶었지만, 색칠까지 하려니까 시간이 한없이 걸리겠더라. 결국 능률을 올리기 위해 컴퓨터로 작업했다. 만화 <사기>는 사실 처음엔 경향신문에 연재하려 시도했다. 뒤늦게 사마천의 <사기>를 접한 뒤 역사가 이렇게 재밌구나, 이걸 일간지 지면에 연재하면 좋겠다 생각해 1998년쯤 신문사로 찾아갔지. 그런데 그때 담당자는 당시 인기 끌던 <광수생각> 같은 만화를 주문하더라고(웃음).”

-그 담당자는 만화를 보는 안목이 없었나 보다. <사기> 외에도 대표작인 <이희재 삼국지>처럼 역사만화로 인기를 끌었지 않나.

“중국 역사 전공자가 아니라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삼국지>만 해도 20년 동안 작품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더라. 기존에 나온 이야기를 그대로 쓰는 게 아니라 모두 습득하고 체화해 또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니까. 그런데 고우영 선생은 한 세대 전에 그런 점들을 다 알고 있었어. 중국 고전을 다룬 게 그냥 쉽게 한 게 아니구나 하고 다시금 느꼈지.”

-독자들이 꼽는 대표작인 <악동이>는 아동만화라 쉽게 그린 편이었나.

“<악동이>는 그 시대의 인식이 만화라 하면 아동만화만 할 수밖에 없던 때라 나온 작품이었지. 운명이란 게 희한해 <악동이>를 연재한 ‘보물섬’은 육영재단이 펴낸 잡지였다. 그때 육영재단 이사장이 박근혜였잖아. 1983년부터 <악동이>를 연재했는데 그때도 창작은 하지 말고 세계명작 같은 거나 만화로 그리라는 주문이 있었어. 그래서 나도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물을 만화로 그리기도 했고. 그러다 꾀를 내 미국 아동소설 원작을 무대만 한국으로 바꿔 그리기로 했다. 원작도 개구쟁이 꼬마 이야기여서 한 3회까지는 원작 내용을 그대로 쓰다가 그다음 편부터 아예 독립적인 이야기로 창작을 시작했지. 나름 편법을 쓴 거야.”

-창작에 목말라 아동만화라는 우회로를 택한 셈인가.

“나는 사실 어른들을 위한 얘길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었으니. 그래서 <악동이>에는 대놓고는 못 했지만, 노동자 이야기도 나오고 악동이가 맞서는 왕남이 캐릭터를 통해 독재정권을 빗대기도 했다. 오늘의 현실을 다루는 게 내 생각에는 맞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한편으론 답답하면서도 나름 위안을 얻었다. 그래도 만화는 판타지적인 대목도 중요하니 <악동이>에도 만화적인 걸 더 살릴 걸 하는 생각이 이후엔 들기도 하더라.”

-<악동이>의 후속작 격인 <아이코 악동이>가 그런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한 작품인가.

“<악동이>를 6년 동안 연재해 나름 캐릭터가 하나 생겼는데, 그 녀석을 출생시켜 놓고 키우질 않으니 아쉬운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와 어린이들이 인문적 내용도 흡수할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 보다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악동이를 해보기로 했다. 악동이 캐릭터에 신화 속 거울계에서 출현한 ‘아이코’ 캐릭터까지 끌어내 둘이 파트너로 어느 역사 지점으로든 갈 수 있게 한 거지. 거울 속으로 들어가면 만리장성 쌓는 시절도 가고, <삼국유사> 이야기 속으로도 가게 하는 식으로 인류사의 옛날이야기를 요리해 보여줬다.”

-<악동이>만 해도 아동만화치고는 사회상을 현실적으로 반영했던 면이 돋보였고, <간판스타>처럼 아예 성인 대상 작품들도 국내엔 드물었던 ‘리얼리즘’ 만화를 개척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악동이>를 그리면서도 어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만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두환 시대를 내 나름으로 분석하니 전두환이 국풍81 행사를 열거나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이 보이더라. 올림픽 열면서 독재정권이란 소리를 듣기 싫으니 출판 쪽도 조만간 자유를 허할 것 같았어. 그때가 와서 만화잡지가 쏟아지면 뛸 선수가 필요할 테니 미리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결국 1986년부터 분위기가 바뀌면서 ‘만화광장’이란 잡지도 나올 수 있었는데 그 무렵엔 40편가량 단편 스토리를 구상해둔 상태였다. 리얼리즘 만화가라는 평을 얻어낼 시간이 온 거였지.”

이희재 작가가 그동안 그려온 자신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 가운데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일러스트로 표현했다. / 이희재 작가 제공

이희재 작가가 그동안 그려온 자신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 가운데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일러스트로 표현했다. / 이희재 작가 제공

-사회 현실을 짚은 만화를 주로 그려낸 데에는 데뷔 때부터 만화계 주변을 돌며 쉽게 정착하지 못한 경험도 반영됐나.

“데뷔 전 1960년대 광주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독자투고란에 만화를 그려 보내기도 하고, 거기 실린 만화를 보고 연락한 작가나 문하생들과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게 인연이 돼서 1970년에 처음 서울 와 만화판에 발을 디뎠지. 뜬구름처럼 떠돌면서 문하생 생활도 하고 백수생활도 하면서 20대 시절을 보냈다. 1970년대만 해도 만화계에서 ‘신촌 대통령’이라 불리던 합동출판사 이영래 사장이 판을 꽉 잡고 있었거든. 그쪽 사람들이 대부분 돈만 볼 줄 알고 문화적인 눈은 없었어. 왜 눈앞에 보이는 돈만 좇을까 하는 불만에 한동안 만화계 주변을 맴돌았어. 완전히 떠난 건 아니고 좀 비켜서서. 애니메이션 만드는 곳에서나 인쇄소에서도 일하고 팬시회사에서 일하기도 하고. 그런 사회생활이 나중에 만화 그릴 때 큰 도움이 됐어. 만화가도 만화만 그려서 될 게 아니라 노동해서 어떻게 밥 벌어먹는지를 알아야 하니까.”

-그때도 만화를 그려야겠다는 열정은 흔들리지 않았나.

“사회생활을 한 게 작가로서의 생각이 커가는 데도 도움이 됐고 창작에 대한 욕구도 바뀌지 않게 해줬다. 암만 좋은 일을 해봐도 만화를 그리고 있는 시간만큼 좋진 않았다. 내가 구상하고 그려가는 창작활동은 마치 내가 조물주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내 생각을 그려가는 거잖아. 세계를 그려내는 기쁨이 만물을 만드는 기쁨이었다고나 할까.”

-사회 현실에 대한 고민이 만화를 둘러싼 이슈가 있을 때 전면에 나서게 만들기도 했나.

“나선 게 아니라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지.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나고 민주화로 세상이 바뀔 것 같으니까 정권에서도 유화책을 써서 대화를 해보자고 하더라. 그때 안기부 출신으로 심의실에 온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 다른 선생 따라간 적이 있다. 검열 얘기가 나오니 나 스스로가 흥분을 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떨면서 얘기한 기억이 있거든. 지금 생각하면 당당하지 못하고 떨었던 기억이 부끄러워.”

-이후 우리만화연대 창립에 나서는 등 조직적인 활동도 이어갔다.

“사회참여는 만화가도 참여할 수 있는 건데 만화판에선 이런 논의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자기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나섰지. 무턱대고 반발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결국 만화만이 아니고 평론 분야와 애니메이션 같은 인접 장르까지 포괄해 지금의 우리만화연대를 구성해왔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에서 만화계의 대표적 기관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까지 역임하게 된 건가.

“사실 진흥원 이사장은 상징적으로 만화가가 맡아 뒷배 역할만 할 뿐이고 실무는 원장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사장 자리도 내가 원래 공중 앞에 나서는 그런 일을 체질적으로 잘 못 하니 전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사장을 하기 전 당시 진흥원 원장이 금품수수로 사고를 치고 물러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이현세 작가가 이사장이었는데 도의적 책임을 지고 내려오겠다고 했거든. 당시 내규에는 이사장 궐위가 발생하면 이사진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대행하게 돼 있어서 이두호 선생이 맡게 될 수순이었는데 그분도 이사 그만두겠다 하고, 그다음인 조관제 선생은 당시 만화가협회 회장이어서 겸직하면 안 되니 나한테 차례가 온 거야. 웃기게도 나는 이전부터 나이순으로 물려받는 건 문제가 있다고 내규를 고치자고 해왔었는데, 개정을 못 한 상태라 결국 내가 덮어쓴 거지.”

-다른 한편으로 국내 웹툰계가 더 성장하기 위한 과제도 보였나.

“잘 모를 땐 일본만화를 비판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일본에서 만화라는 문화의 꽃을 피우는 데 오랜 숙성기간을 거쳐 백화만발의 꽃밭을 피운 모습이 차차 눈에 들어왔다. 우리 만화도 100년이 넘는 역사가 있지만 분단 때문에 사실상 50년 이상을 흉내만 내왔다. 만화는 기껏해야 학습의 도구라는 인식 때문에 박기정 선생이나 김종래 선생처럼 당대 대가들이 50대도 되기 전에 떠나야 했다. 지금의 한국 웹툰은 그때보다 더 활짝 피어나고 있지만, 거대 플랫폼을 장악한 자본이 맹위를 떨치는 모습에 걱정도 된다. 미국의 만화사를 보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만화의 세기를 이끌었던 그들이었지만, 지금 미국 만화계는 저작권을 독점한 마블이나 DC의 위세에 눌려 작가 개인은 결국 부품처럼 전락한 모습만 보일 뿐이다. 만화가 영화 같은 다른 장르에 소재만 납품하는 수준이 돼버린 거지. 내 딸도 웹툰계에 있지만 쉴 시간조차 없이 혹사를 감당하는 걸 눈으로 보면서 미국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다.”

-작가로서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나.

“지금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 장석천 선생의 이야기를 만화로 작업하고 있다. 치열하게 살았으나 이제는 고향에서도 잊힌 사람들의 모습을 만화로 복구해 그 생생한 움직임을 살려내려고 한다. 이제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집중하고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앉아 작업하던 때와 달리 숨이 가쁘지만 몸이 쇠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이치니까. 짤막하게라도 인간과 인생 이야기를 꾸준히 담아내려고 한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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