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친의 유언장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21.06.28

죽은 전남친의 유산을 좇는 변호사

거대 제약회사의 차남 모리카와 에이지가 서른 살에 요절하면서 남긴 유언이 세간에 화제가 된다. 유언 내용은 바로 전 재산을 자신을 죽인 범인에게 상속하겠다는 것. 이에 과거 대학 시절 그와 3개월간 사귀었던 변호사 레이코는 에이지의 친구 시노다로부터 그를 범인으로 내세운 대리인 자격으로 이 기묘한 ‘범인 선출전’에 참여하길 제안받는다. 물론 에이지의 사인은 독감에 의한 병사로 따로 살인자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시노다가 언급한 에이지의 유산은 약 60억엔으로 이런 광대 짓을 감당하기엔 잘나가는 20대 변호사인 레이코의 입장에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료를 검색해보니 에이지가 보유한 주식의 시가총액은 무려 1080억엔에 달한다. 에이지의 부모에게 유류분으로 3분의 1이 돌아가고 남은 유산의 50%를 상속세로 납부하더라도 300억엔이 남으니, 그중 절반을 성공 보수로 받는다면 레이코의 몫은 약 150억엔. 광대가 되길 자처하고도 남는 액수다.

<전남친의 유언장> (신카와 호타테 지음) / 북플라자 제공

<전남친의 유언장> (신카와 호타테 지음) / 북플라자 제공

<전남친의 유언장>의 주인공 레이코는 돈을 지상 최대 가치로 삼는 변호사다. 작품 시작부터 그는 연인이 내민 약혼반지가 40만엔밖에 되지 않는다며 쏘아붙이고, 보너스 400만엔이 250만엔으로 준 데 격분해 다니던 로펌을 때려치운다. 그에겐 돈이 곧 목적이다. 돈만 주면 뭐든 하냐는 비난에 그게 뭐가 나쁘냐고 할 정도로 꽤 순수한(?) 속물이다. 그가 참가한 범인 선출전 역시 모리카와 족벌로 구성된 3인의 합의로 결정되는 만큼 다분히 각자의 잇속을 모두 챙겨야 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듯하다. 여기에 레이코는 에이지의 유언장이 민법 제90조 공서양속, 즉 우리 민법식으로는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에 해당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에두르지 않고 안티히어로를 가장한 레이코를 앞세운 그대로 기상천외한 유산 쟁탈전을 예상해볼 법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유언장 집행을 맡은 고문변호사가 살해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곧 전통적인 미스터리 장르의 색채를 띤다. 이는 아주 정통의 방식이지만 유언장의 진짜 목적과 결부되면서 오히려 다시 한 번 변칙을 가하는 듯하다. 예컨대 모리카와가(家) 내부에 도사린 견제와 권력 승계가 익숙한 그림을 그리는 한편, 생전 순수한 모습으로 기억되던 에이지답게 유언장에는 ‘전여친들’에 배분할 토지가 기입돼 있는 등 여러모로 의구심을 자아낸다. 이것은 작중 인류학자를 통해 언급되는 ‘포틀래치’, 즉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갚는 경쟁적 증여로 부담을 덧씌우려는 재벌가 철부지 도련님의 유희에 불과할까? 레이코는 이 모든 의심을 토대 삼아 진실에 접근하면서 살인도 불사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욕망에 다가선다.

무엇보다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주변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레이코의 배금주의에 생기는 균열은 흥미롭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초심과 변호사로서의 사명감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성장을 한다는 익숙한 스토리지만, 레이코의 깨달음은 영웅담이기보다는 철저히 소시민적으로 그려지기에 잔잔한 울림마저 안긴다. 2021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작답게 왕도와 변칙을 아우르는 구성이 미스터리 장르 고유의 매력을 작품 내내 한껏 북돋는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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