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한 과학자의 죽음 앞에서

김우재 낯선 과학자
2021.06.14

5월 22일 유엔 경제사회국 트위터 계정에 한 과학자의 부고를 알리는 글이 올라왔다. “오늘 우리는 한 식량 영웅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중국의 과학자 위안룽핑은 최초의 교잡벼를 개발해 수천만명의 인구를 굶주림에서 구했습니다. 그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굶주림을 없애려던 그의 유산과 사명은 계속될 것입니다.”

중국 ‘교잡벼’의 아버지로 불리는 농학자 위안룽핑(가운데) / AP연합뉴스

중국 ‘교잡벼’의 아버지로 불리는 농학자 위안룽핑(가운데) / AP연합뉴스

위안룽핑, 교잡벼의 아버지라 불리는 과학자가 죽었다. 91세의 노과학자는 자신의 교잡벼 연구센터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호송됐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미국과 관련된 여러 사건으로 시끄러웠지만, 중국인 모두가 한 과학자의 죽음을 진심으로 추모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웨이보의 해시태그는 66억건의 조회수를 올렸고, 무려 1300만개의 댓글이 달렸다. 병원 앞엔 수천개의 꽃다발이 배달됐고, 시진핑 주석은 후난성위원회 서기를 보내 가족을 위로했다. 중국인뿐 아니라 세계 언론과 네티즌들이 글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 한 과학자의 죽음으로 세계가 이렇게 슬퍼하는 모습은 드문 일이다.

중국 정부가 식량안보를 강조한 맥락이 있었다고 해도, 위안룽핑에 대한 추모 열기 속에는 굶주림에서 중국인을 구한 과학자에 대한 진심이 녹아 있다. 또한 중국인 과학자가 개발한 기술이 전 세계의 식량난을 해결했다는 자부심도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위안룽핑의 죽음이 보여주는 교훈에는 한 국가에 속해 연구하는 과학기술자라 해도 결국 인류 전체의 복지라는 보편적인 목표를 향해야만 한다는 상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상식이 현재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의 과학기술굴기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인지 모른다. 여러모로 위안룽핑의 죽음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이해하는 훌륭한 지침서가 된다.

실험과학 속에서 구도의 길을 찾다

1959년, 중국엔 대기근이 들었고 수백만명이 아사했다. 바로 이 시기 위안룽핑은 유전학과 육종을 전공으로 충칭 농업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원래 멘델과 모건의 유전학적 이론을 통해 육종에 도움을 주는 연구를 수행하던 과학자였고, 벼가 아니라 감자처럼 단순한 식물로 멘델과 모건의 이론을 증명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공산권 국가에서는 소련의 유전학자 리센코의 이론이 유행하고 있었다. 리센코는 라마르크식 진화를 주장하던 유전학자로, 소련의 정치적 이념에 맞춰 과학이론을 왜곡했던 전형적인 정치과학자였다. 리센코의 비과학적 태도와 소련 정치인들의 이념적 독단이 만나자 리센코의 학설에 반대하던 과학자들은 모두 숙청됐고, 리센코의 유사과학 이론에 입각해 실시된 농업정책 덕분에 소련의 농업은 비가역적인 피해를 입는다.

위안룽핑이 유전학을 공부하던 시기가 바로 리센코주의의 전성기였다. 당시 중국에서도 공산주의 이념에 경도된 몇몇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리센코주의를 수입해 활발하게 가르치고 있었지만, 다행히 멘델과 모건의 현대적 유전학도 함께 들어와 있었다.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위안룽핑은 감자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빠르게 멘델과 모건의 유전학 이론이 식물의 대물림을 설명하는 올바른 이론틀임을 증명했다. 이후 그의 육종 연구는 멘델과 모건의 이론에 따라 펼쳐졌다. 몇몇 과학자들에게 탄압받기도 했지만, 경쟁하는 과학이론들에 대한 마오쩌둥의 실천적 관점 덕분에, 위안룽핑의 연구는 큰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렇게 준비된 이론틀을 들고, 1959년 대기근의 참극을 목도한 위안룽핑은 바로 다음해인 1960년 벼 연구에 뛰어들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벼의 5분의 1이 위안룽핑과 그의 제자들이 개발한 교잡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처음으로 수확량이 20% 이상 늘어난 교잡벼 생산에 성공하기 전까지 위안룽핑은 오직 실험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공산권 국가의 과학자였지만, 멘델이나 모건 같은 서구과학자가 걸어간 실험과학자의 길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철저한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들에 의존했으며, 그외의 어떤 매력적인 이론에도 끌리지 않았다. 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철저한 실험에서 멘델과 모건의 이론을 검증했으며, 일단 이론이 검증되면 이를 굳건히 신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의심하되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 그렇게 증명된 이론을 발전시키는 실험과학자의 철학은 멘델과 모건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신이다. 위안룽핑이 교잡벼 연구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법은 그가 흔들림 없이 실험과학자의 길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그런 과학자가 있는가

“우리는 높은 수확량, 더 높은 수확량만을 추구했죠. 그것만이 우리의 영원한 주제였어요. 왜냐고요. 중국 인구는 이렇게 많은데 인당 경작지는 이렇게 적어요. 과학기술의 향상만이 단위면적 생산량을 더 높일 수 있고, 우리 식량 안전문제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인물 특집으로 방송된 프로그램에서 위안룽핑이 한 말이다. 식량난 해결을 위한 유일한 해법은 과학기술뿐이었다. 그리고 중국사회는 그 신념을 존중했다.

1979년 미국 농무부는 위안룽핑이 개발한 교잡벼에 사용료를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지적재산권이 수출된 것이다. 그렇게 전 세계로 수출된 교잡벼는 인도, 베트남, 미국, 브라질, 아프리카로 퍼져나갔고, 수백만명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마다가스카르는 최고액 지폐에 위안룽핑의 교잡벼를 도안으로 새겼다. 2004년 세계식량상은 위안룽핑에게 돌아갔다. 위안룽핑은 평생 두가지 꿈을 꾸었는데, 하나는 높이 자란 벼 아래서 시원함을 즐기는 것, 다른 하나는 교잡벼가 세계를 뒤덮어 식량 생산이 증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놀라울 정도로 이어지는 중국의 추모 열기 속에서 작은 상상을 해봤다. 우리에겐 그의 죽음에 국민 모두와 세계가 함께 슬퍼할 그런 과학자가 단 한명이라도 있는가. 위안룽핑에게 쏟아지는 이 추모의 물결 속엔, 한국의 과학기술계와 정치계가 함께 생각해봐야 할 교훈이 스며 있다. 과학연구는 오직 과학적 근거에 기댈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이념이 과학연구의 실천을 방해해선 안 된다. 과학연구의 목표는 개인의 호기심뿐 아니라 사회적 목표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 당장 먹거리로 연결되지 않는 연구라 해도 그 연구의 철학적 바탕엔 사회적 의미가 반드시 녹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 과학자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과학자를 연예인처럼 만들거나 연예인보다 존경받는 과학자가 없는 사회는 불행한 곳이다. 우리에겐 그런 과학이, 그런 과학자가 있는가.

김우재는 한때 초파리로, 지금은 꿀벌로 세계정복을 꿈꾸는 과학자다. 동물의 행동을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사회성 행동을 유전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연구 외에도 과학의 사회적 사용에 관심이 많으며 <플라이룸> 등의 책을 저술했다. 현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연구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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