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빛의 제국이 비추는 것

박은하 사회부 기자
2021.05.10

부산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경남마리나아파트는 1996년 입주가 시작된 판상형 아파트다. 10~15층 건물 8개동에 624세대가 산다. ‘마리나’는 해양레저시설과 산책로를 갖춘 항구를 뜻한다. 이름답게 수영만 인근에 있어 거실에서 베란다를 보면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약 650m 떨어진 해안가 공터에 독특한 외관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부산광역시 제공

부산광역시 제공

공터는 본래 바다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요트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해 요트경기장을 만들면서 만들어졌다. 대우그룹은 이곳에 초고층 호텔 등을 지어 관광단지로 만들려 했지만, 외환위기로 공중분해되면서 사업은 무산됐다. 대우그룹이 통째로 사들였던 땅은 쪼개져 팔려나갔지만, 경제위기 여파로 신규 사업이 진행되지 않아 이후에도 10년 가까이 공터였다. 2000년대 중반 누군가 발상의 전환을 한다. 바다가 보이는 공터에 굳이 관광단지를 지어야만 할까. 부자들을 위한 호화주거지를 지으면 ‘대박’이 나지 않을까. 이 발상의 전환은 경남마리나아파트 주민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의 삶과 의식, 문화를 바꿔놓는다.

수영만 매립지가 마린시티가 되기까지

발상의 전환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외환위기를 딛고 살아남은 중산 이상 계층에게는 부를 과시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2000년대 초부터 불을 지핀 건설경기가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개발 등으로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타올랐다. 부산의 경우 도심 노후화 현상이 심각했다. 부자들은 새로운 집을 원하고 있었고, 시중에 돈은 넘쳤다. 수영만 매립지에는 2001년 현대카멜리아, 해운대현대하이페리온, 트럼프월드마린 등 30~40층대 아파트가 속속 들어섰다. 2007년 해운대아이파크가 착공하면서 부산 도시계획은 ‘특이점’을 맞이했다.

해운대아이파크는 높이부터 달랐다. 최고높이는 292m. 지하 5층, 지상 46~72층 건물 3개동과 파크 하얏트 부산 호텔이 우뚝 솟았다. 1631세대가 사는 대단지였다. 무엇보다 화제가 됐던 것은 건물 외벽이 모두 유리로 덮인 통유리 형태로 지어졌다는 점이다. 벽 대신 기둥으로 하중을 견디게 하고 외벽은 유리로 마감하는 커튼월 공법을 사용하면 네모반듯한 건물뿐 아니라 곡면, 타원 디자인으로 건물을 만들 수 있다. 바다와 하늘 색깔처럼 푸른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통유리 거물은 콘크리트 외벽의 고급 아파트 사이에서도 도드라졌다. 해운대아이파크보다 늦게, 그런 만큼 더 높이 올린 두산위브더제니스(80층/301m)도 똑같은 통유리 건물로 지어졌다. 빛나는 바다색으로 물든 거대한 탑들이 들어선 도시는 부산은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동네로 거듭났다. ‘수영만 매립지’가 ‘마린시티’가 됐다. 마린시티의 디자인은 인근 ‘센텀시티’ 디자인에도 이어졌다.

마린시티 건물들의 매끄러운 유리 외벽은 빛을 거울처럼 튕겨내면서 반짝반짝 빛나도록 하려고 만든 것이다. 반사된 빛은 경남마리나아파트로 내리꽂혔다. 경남마리나아파트 일부 주민들은 해운대아이파크가 완공되기 전인 2009년 ‘빛 공해’로 피해를 입었다며 아이파크 시공사인 HDC 현대산업개발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낮시간 너무나 눈부신 빛이 집 안으로 들어와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불능현휘)과 심리적 불안감, 실내온도 상승으로 인한 난방비 증가, 향후 아파트 가격 하락 등이 손해의 예로 제시됐다. 청구액은 1인당 100만원이었다.

1심을 맡은 부산지법 동부지원은 2010년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빛 반사로 인한 일조권이 침해되는 시간이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봤다. 2심을 맡은 부산고법은 HDC 현대산업개발이 원고들에게 1인당 100만원씩 지급하라고 2011년 판결했다. 불능현휘를 일으키는 빛 공해에 집중했다. 재판부는 일부 세대는 연간 187일까지 불능현휘 현상이 나타나고 하지에는 불능현휘 지속시간도 일일 1시간 15분에 달한다고 봤다. 빛의 휘도도 기준치보다 2800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인정했다. 이는 수인한도(참아줄 수 있는 한도)를 벗어난 것으로 개발사의 ‘가해’가 인정됐다고 본 것이다. 난방비 상승 부분은 입증이 부족하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달 대법원은 2심의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상고심이 제기된 후 8년, 해운대 아이파크 완공 10년 만의 판결이다.

빛의 제국이 남긴 질문

빛공해 소송이 남긴 여파가 있다. 대법원 판결이 지지부진한 동안 곳곳에서 빛공해 소송이 일어났고, 하급심에서 승소판결이 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빛공해는 낯설지 않은 개념이 됐다. 커튼월 공법과 통유리 건물에 대한 부정적 시선도 높아졌다. 강풍이 불어닥치면 마린시티 건물에서는 유리 파손 사고가 발생했고, 이는 행인들의 안전문제로 이어졌다. 빛공해나 강풍 시 안전문제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부정적 ‘외부효과’로 볼 수 있다.

소송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외부효과’로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기후문제이다. 통유리 건물 거주자들의 불만도 높다. 통유리 건물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킬 수 없고 냉난방 효율도 나쁘다. 에어컨을 틀었다가는 관리비가 너무 높게 나와 여름철 내내 낮시간 카페에 있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인터넷에 올라온다. 정부에서도 그린뉴딜의 일환으로 통유리 건물의 경우 단열효율이 높은 자재로 교체하는 것을 지원하는 사업을 한다. 건축 시장에서는 커튼월 공법 대신 커튼월룩 공법, 즉 통유리처럼 보이게 하는 공법이 관심을 끌고 있다. 기존대로 콘크리트로 건물을 짓고 외벽만 알루미늄이나 얇은 유리를 부착하는 것이다. ‘향후 자산가치’를 위한 선택이라며, 아파트 재건축 조합 등에서 논의되고 있다. 빛의 제국은 문제가 많다고 인식되지만, 여전히 외관만은 빛의 제국을 닮고 싶어하는 욕망은 남아 있다.

욕망과 불평등도 외부효과로 볼 수 있을까. 해운대아이파크가 쏘아 올린 부산 해안가 고급주택 개발 붐은 2019년 완공된 엘시티에서 정점을 찍었다. 부산시가 해운대 가장 아름다운 바다 근처의 땅을 상업지구로 이용하려 했던 당초 도시계획을 변경해 부유층 주거지로 바꾸고, 용적률을 높여주고, 대신 부산 정관계 인사들에게 뇌물과 청탁 등이 오갔다는 엘시티 의혹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 중인 이영복 회장이 입을 열지 않았다는 이유로 2017년 검찰수사에서 묻혔다. 시민단체의 고발로 현재 경찰이 재수사 중이다. 다수가 누릴 수 있었던 바다를 독점하고, 자산가치 상승을 기대하고, 또한 외관부터 다른 건축물을 만들어 구별 짓는 삶의 형태는 경제학에서나 법에서나 ‘외부효과’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 다만 빛의 제국과 함께 살아가는 한 떠안는 숙제로 남아 있을 것이며, 빛공해처럼 질문이 던져질지도 모를 일이다.

판결정보(사건번호) 대법원 2013다59142, 부산고등법원 2011나474,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2009가합3899.

<박은하 사회부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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