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한국수미다전기 노조의 일본 원정 투쟁

림보 ‘회사가 사라졌다’ 공저자
2021.05.10

한국수미다전기는 1972년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설립한 100% 일본 투자기업으로 전기·전자 부품회사다. 1억여원의 자본금으로 출발한 회사는 16년 동안 70배 가까운 성장을 이뤘다.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파장으로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많은 사업장에 노동조합이 생겼다. 한국수미다전기 노동조합도 1987년 8월 11일에 설립됐다. 그러자 외자 유치를 이유로 각종 혜택을 누리며 싼 임금으로 이윤을 축적하던 외자 기업들이 서서히 철수할 채비를 했다. 한국수미다전기 역시 서서히 중국과 말레이시아로 생산설비를 이전하고 있었다. 1988년 10월 이후 본격적으로 인원을 감축했다. 노조와 협의 없이 희망퇴직자 신청을 받거나 갑작스러운 업무 변경으로 조합원들을 불안하게 하여 퇴사를 유도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박정숙 감독)의 스틸컷

다큐멘터리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박정숙 감독)의 스틸컷

1989년 10월 14일 ▲주문 감소, 재료 조달 중지, 은행 대출 중단 등으로 도산 ▲전 사원 450명 집단해고 ▲공장과 기계 매각금으로 임금과 퇴직금 지급 등이 적힌 종이 한장을 팩시밀리로 받았다. 노조는 1989년 11월 1일에 ‘집단해고 철회 및 대표이사 소환 요구’를 내용으로 한 진정서를 노동부에 접수하고 일본 원정 투쟁을 준비한다.

도쿄 본사 앞 길바닥에서의 238일

한국수미다전기를 포함한 9개 회사의 노조(한국피코, 한국TC전자, 한국TND, US마그네틱스, 에프코아코리아, 금산전자, 한국동경전자, 아세아스와니)는 1989년 10월에 ‘외국자본 부당철수 집단해고 및 노조 탄압 분쇄 공동투쟁위원회(외자 공투위)’를 결성했다. 한국수미다전기 노조의 일본 원정 투쟁은 민주노조운동 조직의 지원과 연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수미다전기 노동조합 정현숙 위원장, 김순미 부위원장, 박성희 조사통계부장, 정순례 조직차장은 1989년 11월 15일부터 1990년 6월 8일까지 238일, 거의 8개월을 일본에서 싸웠다. 이들은 일본 시민운동 진영과의 각별한 연대를 통해 수미다 경영진과 교섭 투쟁을 벌였다. 본사와 첫 번째 교섭은 1989년 12월 21일에 시작했으나, 12월 26일 4차 교섭으로 결렬이 되고, 대표단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일본의 신문과 방송은 투쟁단의 단식농성을 보도했고, 1000명 이상이 농성장으로 지지 방문을 왔다. 수미다 본사는 여론에 밀려 교섭을 재개했다. 단식 50시간 만인 12월 28일이었다. 그러나 출정교섭단의 비자 시한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듯, 본사는 교섭에 불성실했다. 참다못해 교섭단은 1990년 4월 14일에 두 번째 무기한 단식농성을 결행한다. 이 단식농성에는 신부와 수녀들이 동조 단식으로 힘을 보탰다. 일본 국회의원 41명의 서명과 ‘한국 여성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여성들의 모임’ 등 일본 시민 600여 명의 항의 서명도 본사에 전달됐다. 1990년 6월 8일 최종교섭을 통해 작성된 합의문 1항의 주된 내용은 본사의 사과다. “한국수미다전기 전 사원에게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주어 조합대표가 일본에 와서 교섭하게 된 것을 사과한다.” 이러한 사과는 일본 내의 노동쟁의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합의문에는 ▲1989년 10월 14일자 ‘도산 해고통지’ 철회 ▲임금, 연월차 수당, 퇴직금, 퇴직위로금 지급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한국수미다전기 노동조합 교섭단의 길고 긴 원정 투쟁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한국에 투자한 일본 기업의 노동실태에 대한 조사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

박정숙 감독의 <첫사랑- 1989, 수미다의 기억>은 한국수미다전기의 원정 투쟁을 기록했다. 부산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 지 10여년이 흘렀다. 영화는 2007년 일본에서 열린 수미다 동창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행사에 참여한 박성희씨가 인사하기 전, 사회를 맡은 한 사람이 힘차게 그러나 약간 서툰 우리말로 구호를 외쳤다. “투쟁! 투쟁! 생존권 위협하는 집단해고 철회하라! 살인적인 집단해고 온몸으로 거부한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수미다전기 원정 투쟁단과 함께 연대해 싸우던 ‘생존권 야마우라’다. ‘수미다 노조와 연대하는 회’ 사무국장인 야마우라 에이지는 수미다 노조 조합원들과 소통하기 위해 가타카나로 쓴 구호와 노래들을 외웠다고 했다. 1990년, 8개월간의 싸움을 정리하는 수미다 노조의 집회에서 야마우라는 ‘현숙, 순례, 성희, 순미.’ 네사람의 이름을 차례로 부른 뒤 “‘축하한다’는 말 대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인사했다.

다큐멘터리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박정숙 감독)의 스틸컷

다큐멘터리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박정숙 감독)의 스틸컷

수미다 동창회, 고맙다고 말한 사람들

수미다 조합원들을 지원한 모임은 일본 내 ‘(외국) 진출기업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이다. 도쿄에만 100여명의 회원이 있으며, 일본계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감시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다 성당의 오쿠라 가즈요시 신부가 1986년 노동운동을 위해 조직한 이 모임은 수미다 조합원들이 일본에 오자 이름을 ‘수미다 노조와 연대하는 회’로 바꾸고, 조합비 500여만원을 들고 일본에 간 4명의 노동자를 위한 모금도 했다.

“수미다 투쟁 이후에 삶에서, 정면돌파든 측면돌파든, 피하지 않고 부딪혀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도 못 느끼는 사이에.”(정순례, 다큐멘터리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

수미다 투쟁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4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지치지 않고 투쟁하던 모습을 마음에 담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민중가요를 부르는 모임에서 활동하거나 오키나와에서 평화운동을 하거나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그들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간다. 교섭단으로 참여했던 이들에게도 이 투쟁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어쩌면 수미다 노조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더욱 싼 임금을 찾아 효율성 제고와 이윤창출이라는 목표를 향해 길을 헤매고 있지 않은가.

참고자료 다큐멘터리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 박정숙, 2010.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박민나, 지식의 날개, 2004. ‘일본계 외자 기업의 공장 철수에 대한 한일 노동자 풀뿌리 국제연대: 1989년 수출자유지역 노조의 일본 원정투쟁 사례’, 이종구·심상완·이상철, 2017.

<림보 ‘회사가 사라졌다’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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