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문가, 정치권,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대학서열 해소 방안이 심심치 않게 논의되고 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도 ‘대학서열 해소 열린 포럼’을 출범시켜 전문가와 시민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으며, 몇몇 국회의원도 직간접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 가운데 10개 국립대학 중심의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는 방안과 처음부터 사립대학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방안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선생님, 마지노선이 ○○대예요.” 몇 년 전, 반수를 결정하고 수능을 치른 후 성적표를 들고 온 제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한 말이다.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능을 망쳐 기대 이하의 대학에 들어간 제자는 다니는 대학은 물론이고 학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국어고등학교까지 들어가서 간 곳이 그 대학이냐는 주변의 시선은 둘째치고 스스로에게도 용납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자퇴를 하고 반수를 결정한 걸 보면 반수에 실패해도 그 대학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정시모집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세 번의 지원 기회 중 한두 번은 안정권 대학을 선택하고 나머지 한두 번은 상향 혹은 극상향을 선택한다. “마지노선이 ○○대”라는 제자의 말은 내가 제시한 안정권 대학의 서열이 낮다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이다. 한 번 실패를 경험한 제자에게 두 번의 실패를 안기지 말자는 애틋함으로 신중하게 제시한 대학이었다. 반값등록금에 서울 소재 대학 중 나름 선호도가 높은 공립대학이었지만 그 아이는 펄펄 뛰었다. 결국 수험생들이 외우는 서울 소재 대학 순위 기준으로 내가 제시한 대학보다 두 칸 높은 사립대학을 안정권으로 선택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이것이 피라미드식 대학서열의 현실이다.
과도하다는 말보다 참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대한민국 입시경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서열 해소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러나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하자는 논의는 상당한 허탈감을 준다. 수도권 사립대학 중심으로 대학서열이 매겨지는데 거점국립대학 10개를 네트워크한다고 대학서열이 깨질 것이냐는 질문이 주는 허탈감이다. 수년간 입시 현장에서 학생들과 고락을 같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허탈감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서울의 대학 참여 여부가 관건
대학서열 해소 방안에 사립대, 특히 서열의 상위권에 있는 수도권 사립대가 포함되느냐의 문제에 대중은 특히 민감하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일정 수준의 성적이 되면 상생대학네트워크에 속한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입학을 보장하는 ‘대학입학보장제’를 대중에게 공개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이 네트워크에 포함되는 사립대학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만약 거점국립대만 네트워크에 포함되고 수도권 사립대학이 포함되지 않을 때 과연 대학서열이 깨지겠느냐는 의구심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따라서 대학서열 해소 효과를 배가하는 관점에서 수도권 사립대를 포함하는 전략은 국립대학네트워크보다 효과적이다. 거점국립대와 수도권의 상위 랭킹 사립대학이 함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일정 내신 성적과 수능 성적에 도달하면 입학시키는 완화된 선발방식이 도입된다면 잔혹한 입시경쟁도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수도권 상위 사립대학이 선발이라는 대학입시의 자율성을 비롯한 사학의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네트워크에 들어올 것이냐이다.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도 상당하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 볼 문제도 아니다. 대학네트워크 방안의 기본적인 콘셉트는 과감한 예산지원과 공공성을 비롯한 대학의 사회적 책무성을 ‘빅딜’하는 것이다. 네트워크 안에 들어오는 대학은 인건비를 비롯한 경상비의 상당 부분을 정부로부터 지원받게 된다. 그 대가로 입학생 선발에 공공성을 강화하는 조건을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 빅딜을 통해 사립대학은 학생 1인당 교육비를 최상위 대학에 준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부실한 재정안정도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의 재정지원사업에 기대야 했던 불안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다.
재정 지원으로 참여 유도해야
소위 수도권 상위 서열에 위치한 대학도 이러한 파격적 재정지원을 사학의 자유를 명목으로 포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례로 몇해 전에 서울 명문 사립대학 중 한 곳은 연간 6~7억원 정도를 지원받던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에서 탈락했다. 이 재정지원사업비로 대학은 입학사정관 인건비를 충당한다. 재정지원사업에서 탈락하자 해당 대학은 입학사정관 20여명을 해임했다. 입학사정관 안정성이 해당 재정지원사업의 중요한 평가지표인데 이러한 행보를 했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사업에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학은 몇해 되지 않아 다시 이 사업에 지원하게 된다. 6~7억원 정도의 정부 지원이 줄어드는 것이 수도권 상위 사립대학에도 큰 피해라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 지금까지 제시된 대학네트워크 방안에서 참여 대학에 지원하는 예산은 최소 100억원 단위에서 최대 1000억원 단위가 논의된다. 이 정도 지원이면 서울 소재 상위 사립대학도 참여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대학네트워크에 사립대학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 거점국립대의 참여가 용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립대학의 참여를 열어놓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파격적인 재정지원을 받으며 공공성 강화를 위한 사회적 책무를 다할 대학을 공모하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선발방식을 완화해 대학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한다든지, 대학 운영의 민주성을 강화한다든지 대학 재정 운영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등의 공공성 강화 방안을 공모 기준으로 내걸고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참여를 이끌어내면 된다.
초기에는 사립대학의 참여가 저조하더라도 국립대학과 이미 참여한 소수 사립대학의 교육 여건이 안정적으로 올라가는 효과가 미참여 사립대학에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부가 대학 재정지원사업과 국가장학금 예산을 대학네트워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용도로 전환한다면 사립대학의 참여는 자연스럽게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국립대학과 수도권의 상위 사립대학이 네트워크로 묶여 입시경쟁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선발을 전환한다면 많은 사람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대학서열 해소가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전망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