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SKY대학 비인기학과 재학시절, 정원이 40명인데 무려 7명이 고교 동기였다. 한 외고 출신인 우리에게 대학은 그저 ‘간판’이었음을 의미한다. 모 입시명문고 총동문회 날엔 서울대 특정 비인기학과가 휴강한단 농담 속 의미도 비슷할 것이다. 교사의 길로 가고자 다른 대학 사범대로 학사 편입하며 돌아보니 4년의 등록금은 그저 ‘간판값’이었다.
그러나 교사 시절 나는 학생들에게 과거의 나처럼 ‘간판’을 위해 달릴 것을 요구했다. 세상이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이상 어쩔 수 없다 여겨서다. 그런데 뒤늦게나마 또 다른 세상의 존재를 알게 됐다. 어떤 나라들에선 간판을 위해 대학에 가지는 않는다. 그 나라들에서 대학교육은 ‘모든 국민(사람)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국립)대학 학습에의 균등한 참여권 및 평등하게 대학에 입학할 권리는 직업의 자유와 평등권에서 도출된 기본권”이라고 선언했고, 프랑스 교육법엔 “모든 바칼로레아 취득자는 일반대학 공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쓰여 있다. 이렇듯 유럽에서 대학교육은 모든 국민의 ‘권리’이고, 그러니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다.
대학교육이 ‘권리’인 나라들
유럽 대학의 대부분은 국립대로 등록금이 없고 대학생에게 교통비 등 보조금까지 주는 곳도 많다는 얘기는 이미 유명하다. 또 일반적으로 대학입학은 절대평가인 고교졸업자격시험에 의한다. 이들 나라에선, 대부분이 합격하는 졸업자격시험만 거치면 누구나 간판 서열 없는 국립대학의 입학 티켓을 얻게 된다. 그럼 그 티켓을 쥐고 몇가지 직업을 경험하거나 여행하며 자신을 돌아본 뒤 공부할 분야를 결정하면 원하는 대학(대부분 거주지 대학)의 원하는 전공 분야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 이들에게만 대학교육이 권리일까. 우리도 대학교육을 ‘권리’로, 대학입학의 문을 ‘자격’으로 바꿔야 한다, 구체적으로 대학 무상교육과 대학 서열 폐지 내지 완화를 전제로 한 고교졸업자격시험의 실시가 필요하다.
특히 자격시험화엔 2차원적 사고가 필요하다. 공간 측면에서 지원자들은 ‘서열 없는 대학캠퍼스’에 입학 가능해야 한다. 서열 없애기는 ‘한국대학’ 등 국립대학 통합으로 시작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엔 85%에 이르는 사립대학도 포함해야 한다. 사학의 반발은 자사고의 우선선발권 제재 법리와 대학무상교육(등록금 지원)이란 유인책을 무기로 맞서야 한다. 무엇보다 대학의 자율성이 국민의 교육권 앞에 설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전공 측면에서는 원칙상 누구나 원하는 전공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현 제도와 비교하면 학부제 아닌 서울대 자유전공학과와 비슷하다. 즉 원칙적으로 각 학과에 정원 제한이 없고 다만 예외적 선발에선 독일처럼 ‘대기기간을 존중한 성적순 선발’을 일부 허용할 수도 있다.
서울대 앞에서조차 경쟁적 선발이 없게 하자니, 그럼 대체 누가 열심히 공부하겠냐고? 경쟁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진짜 경쟁’을 하자는 거다. 모든 사회는 머리 터지게 공부할 이들이 필요하다. 다만 그건 머리가 다 자란 다음 할 일이다. 여물지 않은 머리로 하다간 진짜 머리가 폭발할 수 있다.
“경쟁은 경쟁을 낳아 결국 유치원생까지 경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국민에게 설득시켰다. 학교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교양을 쌓는 과정이다. 그리고 경쟁은 좋은 시민이 된 다음의 일이다.” 에르키 아호 핀란드 전 국가교육청장의 말은, 핀란드에서 경쟁 없는 초·중·고와 유급과 낙제가 살벌한 대학이 공존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유럽 나라들엔 경쟁이 없는 게 아니라 시민, 즉 대학생이 된 이후 자기 스스로와 자기 전공 분야에서 경쟁하는 ‘진짜 경쟁’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행복을 누리고, 유럽의 학문과 기술 수준은 결코 낮아지지 않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조삼모사나 경쟁의 무의미한 유예가 아니다. 2019년 프랑스의 한 의대는 1500명의 입학생을 받아 1년 뒤 338명만을 2학년으로 진급시켰다. 의사에게 일정 능력이 요구된다면 그 능력을 위한 경쟁은 자신과의 경쟁이어야 하기에 해당 진급시험은 절대평가였고, 승패의 기준은 전공이어야 하기에 그 기준은 고등학교 삼각함수 점수가 아닌 대학의 해부학 점수였다.
실현가능성은 우리 앞에 있다
이처럼 성인기에 자신의 전공 분야를 일단 공부해보고 그에 따라 진급 여부가 결정된다면 탈락하더라도 원하는 분야의 교육기회를 무상으로 균등하게 제공받았으니 그의 교육권을 단단히 보장한 것이 된다. 맞지 않는 전공을 벗어나 다른 전공으로 가거나 대학 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니 방향전환의 효과도 있게 된다. 또 아동학대급 조기 입시경쟁도 멈출 수 있고, 해당 시스템은 그 자체로 유럽의 대학진학률이 낮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어떤 전공 분야를 진짜 공부하고 싶은 이들만 그 전공을 택해 공부하고 엄격한 관리 하에 졸업하게 하는 대학, 각 개개인의 적성과 능력을 최고로 발달시킬 수 있는 대학은 개인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효율적이다. 그저 간판을 위해 입학해 전공과 무관한 취업준비나 공무원시험, 전문직시험에만 열을 올려도 자동으로 졸업 가능한 지금 우리의 대학과 달리.
비현실적으로 들린대도 대안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다. 교육부는 2025년부터 시행될 고교학점제가 내신 절대평가를 전제함을 거듭 확인했다. 수능의 경우 2028년부터는 영어와 역사 과목을 넘어 모든 과목으로 절대평가를 확대할지 의견 취합 중이다.
내신과 수능의 절대평가화는 지금까지 ‘선발시험의 문’이었던 대학입학의 문을 ‘자격시험의 문’으로 바꾸고 대학 공교육을 국민의 권리로 바로 서게 할 중요한 열쇠다. 따라서 교육부는 하루빨리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기도 한 ‘수능 전과목 절대평가화’를 선언해 대학입학의 문을 완전한 자격시험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 고교등급제나 비교과 악용 등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제도를 왜곡하지 않도록, 대학 무상교육과 서열 없는 대학캠퍼스 구축(대학서열 폐지)을 병행해 어떻게든 ‘선발’하려는 대학들의 이기적 욕망을 꺾어야 한다.
2017년 마크롱 총리가 국립대학의 일부 인기학과에 선발을 도입하고 유학생에게 등록금을 받는 대학 개혁안을 선포하자 프랑스 고교생들은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교사들은 바칼로레아 감독을 거부했다. 프랑스 국민에게 보편적인 대학교육인 국립대학교육을 받는 것은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대학교육은 권리여야 한다. 우리도 서열 없는 대학교육을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도 외쳐야 한다. 우리에겐 ‘서울대를 추구할 권리’를 넘어 ‘서울대 들어갈 권리’까지 있다고.
<박은선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교육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