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은 왜 생동성 시험 나서나

김태훈 기자
2020.11.09
실제 해보는 것만큼 현장을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하니보니>는 주간경향 기자들이 현장을 직접 체험한 뒤 작성하는 체험형 르포기사입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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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실은 흰 시트가 씌워진 병상으로 가득했다. 이미 배정된 병상에 자리 잡은 지원자들과 빈 병상을 채울 나머지 지원자들을 모두 더하면 60여명이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난다. 10월의 어느 날, 생물학적 동등성(생동성) 시험을 진행하는 서울 관악구의 한 종합병원 임상시험센터 내부의 풍경이다. 시험을 진행하는 병원 관계자들이 사진 촬영은 안 된다고 경고했다. 지켜야 할 주의사항은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때맞춰 돌아오는 채혈시간을 반드시 지킬 것, 입원실이 있는 층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다. 모든 지원자가 정해진 입실 시간에 맞춰 입장하고 1박2일씩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생동성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생동성 시험은 제약회사가 새로운 약을 출시하기 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임상시험의 일종이다. 이전에 없던 신약을 출시할 때에는 1상부터 최대 4상까지 가는 단계적 임상시험을 진행한다. 생동성 시험은 이미 출시된 약의 특허 기간이 만료되어 다른 제약회사들도 같은 성분의 복제약(제네릭)을 내놓으려 할 때 진행되는 시험이다. 복제약을 투여했을 때 유효성분이 인체 내에서 오리지널 약과 같은 수준으로 작용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래도 부작용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신약 임상시험보다는 이미 출시되어 효과와 기전이 잘 밝혀진 성분의 복제약을 투여하는 것이 생동성 시험이라 지원자들도 심적 부담은 덜한 편이다. 제약회사는 병원에 시험을 의뢰하면 병원의 임상시험센터 의료진이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진행한다.

약의 성분과 시험 일정에 따라 다르지만 입원은 최소 두 번 해야 한다. 한 주는 기존의 오리지널 약을 먹고, 다른 주에는 출시예정인 복제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 성분이 몸 안에서 지속되는 시간 등을 고려해 한 번 입원할 때 며칠 동안 입원실에 갇혀 있어야 할지는 다 다르다. 기자가 지원한 시험은 1박2일, 투약 전날 입원을 마치고 투약 당일 오전 투약 후 12시간 동안 병상에서 자리를 지키면서 정해진 시각마다 채혈을 진행하는 일정으로 진행했다.

제약회사 출시 전 거치는 임상시험

투약일 전날 입실과 함께 시험을 진행하는 병원의 간호사가 주의사항을 하나하나 알려준다. 다른 약물은 물론이고, 병원에서 제공되는 식사 외에는 어떤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된다. 투약 당일에는 기상한 뒤부터 약을 받아먹을 때까지 물도 마시지 못한다. 담배도 금물이다. 약을 먹기 전부터 약을 먹은 뒤 4시간까지는 자리를 지키며 자세를 바르게 하고 움직임도 최소화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시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시험에서 탈락하고, 그러면 시험 참가 사례비를 받을 수 없다. 돈이 걸린 문제니 지원자들은 대체로 지시에 고분고분 따른다.

[하니보니]청년들은 왜 생동성 시험 나서나

지원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례비다. 이 시험은 일정이 짧고 채혈 횟수도 적어 더 긴 기간 동안 진행되는 다른 시험보다는 사례비가 적다. 그래도 80만원 안팎, 1박2일로 두 번을 입실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에 비하면 적지 않은 돈이다. 게다가 별다른 노력이 요구되는 일도 아니다. 약을 먹고 지시만 잘 따르며 정해진 시각의 채혈만 꼬박꼬박 해주면 받을 수 있다.

“처음 참여했어요. 돈이 필요하니까 했죠.” 점심 식사 후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러 온 20대 참가자 K씨에게 들은 대답이다. 대부분이 혼자 참가했기 때문에 서로를 모르는 지원자들 사이에서 대화가 오가는 일은 드물다. 병실은 때마다 채혈 순서를 알리는 간호사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하다. 화장실에서나 겨우 다른 지원자들의 생각을 물을 수 있었다. 30대 참가자 S씨는 이번 시험이 처음이 아니라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참가가 가능할 때마다 한 번씩 참가했고, 3상 임상시험도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사례비는 두 배가 넘었다는 말도 했다. 그는 “예전에 스마트폰도 없고 노트북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시험 내내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는 과거 이야기부터 “돈 벌어야 하는데 부작용 걱정하면 못한다. 이제껏 10번 정도 해본 적 있지만 딱히 부작용은 없었다”는 말도 했다.

돈 때문에 시험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아도 그럴 수 없는 지원자들도 많다. 19세 이상이어야 하고, 비만이거나 너무 말라도 참여할 수 없다. 다른 약물을 먹거나 흡연·음주량이 기준 이상이어도 안 된다. 짧게는 2주 안에 헌혈을 한 이력이 있어도 안 된다. 지난해부터는 시험 참가 횟수에도 제한을 강화해 이전까지 연 4회 가능하던 시험 참가 횟수가 연 2회만 가능하게 줄었다. 그밖의 다양한 신체기준을 검진하는 신체검사까지 통과한 지원자 중에서도 경쟁률을 뚫은 사람만 최종적으로 시험에 참여할 수 있다. 참여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투약 전날 입실까지 했어도 그날 다시 생체 지표를 확인한 뒤 문제가 있으면 예비자로 남거나 아예 참가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번 시험에서도 한 명이 참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투약 전날 밤은 낯선 병상에서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아 뒤척였는데, 투약 당일 오전 6시 기상 후부터는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졸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기상 후 2시간 동안 꿈쩍 않고 자리에 앉아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웹서핑만 하다 드디어 오전 8시부터 투약을 시작했다. 약을 먹은 뒤에는 제대로 삼켰는지 혓바닥까지 들어보이며 검사를 했다. 투약 직후부터는 15분마다 4차례 채혈을 했고, 이후 30분, 1시간, 2시간 순으로 차차 채혈과 채혈 사이 시간 간격이 길어졌다.

신체검사 통과하면 두 차례 입원

마지막 채혈이 시작되는 오후 8시가 다가오자 슬슬 병실 안은 어수선해졌다. 지원자들이 시험 진행 중 입어야 하는 유니폼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채혈이 끝나는 대로 귀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채혈 순서는 배정된 지원자 번호순으로 진행되니 앞당길 수도 없지만 1분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은 흡사 예비군 훈련을 마칠 때 전력질주도 마다하지 않는 심정과 비슷하다. 문제는 1주차의 경우 다음 주에 또 한 번 갑갑함과 지루함을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는 것.

시험 참가 전 신체검사에서 해당 시험을 설명하던 의사는 “여러분들의 참여 덕분에 품질과 안전성이 확보된 약을 제약회사에서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며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에서 진행된 임상시험은 모두 714건(국내 시험과 다국가 시험 합계)으로 역대 최다였다. 한 국가 안에서만 이뤄진 임상시험 건수로만 따지면 세계 3위, 다국가 시험까지 더하면 8위가 된다. 한국이 ‘임상시험 대국’이 된 데는 이들 지원자의 힘이 작용했다. 하지만 실제 참여한 지원자의 목소리는 다소 결이 달랐다. 센터를 나와 그동안 참았던 담배를 피우던 한 지원자는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알바 그만둬서 쪼들리는데 이 일이라도 해서 다행이다 싶지만, 그렇다고 왠지 주변 사람들한테 떳떳하게 말하진 못하겠더라고요.”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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