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 ‘편지’

전혜진 여행작가
2020.10.19

평범한 이들에게 포기란 새 변화의 첫 순간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두겠소
행여 이 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오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 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가오

[내 인생의 노래]김광진 ‘편지’

처음과 끝이 선명하게 정해진 영화에서는 변화가 늘 천둥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 마음을 바꾸는 계기를 만나더니 다음 날이면 그 결심대로 행동에 옮기는 이가 주인공이다. 현실이라면 가혹했을 변화의 시간이 어찌나 부드럽게 해결되던지, 노래 반 곡이 배경으로 깔리는 동안 몇 컷의 장면이면 끝이다. 그리 툭툭 털어 버리고 상큼한 도약을 하기에는 끈적하게 달라붙는 일상의 습관과 발목을 잡는 장애물들이 지천인데 말이다.

기약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편안한 선택은 사실 ‘하던 대로’다. 늘 하던 방식으로 일하고 이미 아는 사람과 그저께도 먹은 익숙한 음식을 먹으며 가능하면 지금의 사랑이 지속되길 바란다. 참 말이 쉽지, 보통의 사람에게 새로운 변화란 뱃속이 울렁울렁할 만큼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여행작가라는 생소한 길을 가게 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눈을 반짝이며 근사한 답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혁명 이후 모두에게 잊혔던 쿠바 음악이 고스란히 담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음반 한 장이 첫 취재지인 중남미로 이끌었다, 멋들어지게 말하고 싶지만 그건 10분의 1 정도 진실에 불과하다.

이 길로 나서기 전 시사프로그램의 구성작가로 6년간 일했다. 뉴스를 좋아하고 세상사에 관심 많은 나에겐 제격이었지만, 일 년에 두 번 개편철이면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지금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고용에 특별한 기준도 없이 그저 PD의 재량에 따라 작가를 택하는 구조는 참 견디기 힘들었다. 타인의 마음 먹기 하나에 일자리가 왔다 갔다 하는 위태로움, 지금 일이 6개월 후에도 계속 이어질까 하는 의구심은 사람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때 남산자락에 있던 방송국을 떠나며 흥얼거린 구절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였다.

여행작가로 일하면서도 이 노래 첫 마디는 순간순간 찾아왔다. 아침부터 12시간을 걸어도 하루는 왜 이리 빨리 가는지, 해는 뉘엿뉘엿 져가고 내일이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데 저 모퉁이만 돌면 나만이 발견할 특별한 곳이 있을 것 같아 자꾸 욕심이 났다. 그럴 때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라고 중얼중얼 잔뜩 성이 난 발을 달래며 숙소로 돌아갔다.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낯선 도시의 밤은 감당하지 말자고, 내 깜냥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나름의 의식이었다.

돌이켜보면 연애도 그러했다. 주고받는 마음이 항상 같으면 좋으련만 마음의 추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었다. 한쪽으로만 흐르는 마음을 견디는 건 아예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 외롭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한 감정은 쉽게 멈춰지지도 않았다. 하나 마음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는 상태로 걷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무줄이 한껏 늘어나다가도 땅 하고 끊어지는 것처럼,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 않고 “혹시나 기대도 포기”해야 내가 살 것 같은 때는 왔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잘 놓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가 아닐까 싶다. 포기는 나약한 거라고 주야장천 배워왔지만, 평범한 이들에게 포기란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는 제일 첫 순간이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리고 한숨 한번. 일단 놓아야, 힘껏 잡고 있던 게 어제까지의 관성인지 오늘의 욕망인지 내일의 바람인지도 제대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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