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메론> 유머와 풍자, 상상을 자극하는 100편의 드라마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2020.10.12

비극은 예술가의 영감을 자극하는 젖줄이 되곤 한다. 불행이라는 모루 위에서 단련될수록 재능은 정화되기 때문이다. 작가 보카치오가 그렇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 광풍 속에서 그는 근대 소설의 원조인 <데카메론>을 낳았다. 눈을 뜨면 가족과 친구가 하나씩 사라지는 공포스러운 현실은 거꾸로 유머와 풍자 그리고 상상을 자극했다. 작품에서는 영혼·신체, 고민·행동, 구원·쾌락의 이항 대립을 오락가락하는 남성과 여성이 연이어 출몰한다. 타산을 뛰어넘고 본능에 자유로운 인간들이 펼쳐내는 이야기의 낙원에서 죽음은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조반니 보카치오 지음·장지연 옮김·서해문집

조반니 보카치오 지음·장지연 옮김·서해문집

1001일의 야화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마음의 병을 앓는 임금의 살인 행각을 그치게 한 셰에라자드처럼 흑사병의 맹위도 끝없는 이야기 앞에서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열흘 동안의 이야기라는 말뜻처럼 <데카메론>에는 10명의 남녀가 열흘간 100편의 드라마를 늘어놓는다. 전염병을 피해 교외로 떠난 7명의 귀부인과 3명의 청년은 저마다 싱싱한 입담을 뽐내면서 시나브로 일상으로 복귀할 땅 고르기를 한 셈이다.

만담의 시작은 죽음이다. 차펠레토라는 천하의 망종이 종부성사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됐지만, 오히려 신부를 불러 고해를 하고 사후에 성인으로까지 추앙을 받게 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선하다는 암묵적 믿음까지 악용하는 악한에게 이런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살던 대로 죽고 싶은 차펠레토의 의지는 신의 심판이 가져올 두려움까지 넘어서게 만들었다. 전염병이 육체는 얽어맬지라도 욕망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니 죽음조차 인간을 굴복시키지 못한다는 메시지가 선명하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비웃음이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고해성사가 채택된 이후 교회의 영향력은 확대일로를 걸었다. 하지만 작품에 나오는 성직자들은 하나같이 반종교적이다. 음식을 탐하고 이성(異性)을 밝히고 재물에 사족을 못 쓰는 욕망 덩어리다. 그럼에도 사악하지 않다.

농사꾼의 아내를 좋아하는 시골 신부가 남편이 없는 사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내는 꾀는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가난한 사제는 암말을 처녀로 바꾸는 마술을 부린다며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의 부인과 운우지정을 나눈다. 신을 영접하고 싶은 처녀에게 수도자는 “내겐 악마가 있고 네겐 지옥이 있지”라며 사탄을 물리치는 상열지사도 서슴지 않았다.

핑크빛 가십이 무성하지만 음탕하다기보다는 유쾌하다.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의 종교인이 아니라 동네 사람과 같은 생활인의 친근감이 부각되어서다. 중세 초기 신부와 수녀들에게 독신은 필수였지만 순결은 선택이었다고도 한다. 게다가 교회의 정점에 있는 교황의 사생활도 만만치 않다.

<군주론>의 모델로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는 교황이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만사가 종교와 연관되는 중세에서 성(性)과 성(聖)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이 당연하다. 현세와 내세,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데카메론>에서 중세의 남녀는 꽃처럼 피어나서 결실의 가을을 맛본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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