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번역이야”

조홍민 에디터 겸 편집장
2020.08.17

몇 년 전 일입니다. 식당에서 내놓는 메뉴판 음식 이름에 엉터리 영어 번역이 수두룩하다는 뉴스를 접하고 씁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편집실에서]“문제는 번역이야”

육회를 ‘six times’로, 곰탕을 ‘bear thang’으로 표기한 것은 그나마 애교에 가까웠습니다. 돼지주물럭을 ‘massage pork’, 생고기를 ‘lifestyle meat’라고 적어놓은 대목에서는 낯이 화끈거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돼지고기를 마사지한다고? ‘생활습관 고기’는 또 뭐야? 차라리 영어로 옮기지를 말던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올해 초에는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의 입국장에 ‘중국 경유 승객’을 ‘Chinese Light Oil Passenger’로 표기한 검역안내문이 소셜미디어(SNS)에 등장해 터미널 측에서 부랴부랴 떼어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거쳐간다’는 뜻의 ‘경유(經由)’를 디젤 오일을 의미하는 ‘경유(輕油)’로 오역해 벌어진 해프닝입니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번역의 의미를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은 단순히 말이나 글을 다른 언어로 고쳐 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이 1968년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데는 영어 번역자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공이 지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그해 노벨상 시상식장에 나란히 섰고, 가와바타는 수상 소감을 통해 “상금의 절반은 번역자 사이덴스티커에게 주어야 한다”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지난 2월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은 한국어 대사 뺨치게 맛깔나는 영어자막 번역으로 국제 영화계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외국인 관객들은 그 덕택에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어’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두 번역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사례들입니다. 이처럼 한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화의 힘과 깊이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인정하고 공감하도록 하는 데는 솜씨 좋은 번역이 크게 기여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점점 확대되는 번역의 역할과 중요성을 다루는 기사를 취재했습니다. 디지털 시대 번역의 새로운 트렌드에 대해 살펴보고 본래의 의미나 맥락을 살리지 못하는 번역의 문제점과 오역 논란 등을 짚어봤습니다.

문화와 예술 분야의 콘텐츠가 넘나드는 국경이 사라진 지는 한참 됐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드라마를 시작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한류는 이제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화콘텐츠로 정착됐습니다. 장르 역시 영화와 K팝으로 확산됐고, 음식이나 패션 분야에까지 한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다양한 콘텐츠가 해외로 진출하면서 번역의 역할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정확한 뜻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어 본연의 맛과 콘텐츠의 질감을 살리는 것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됩니다.

<조홍민 에디터 겸 편집장 dury12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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