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2020.07.27

고독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20세기 탐정

에어컨이 몸을 식혀준다면 머리를 서늘하게 만드는 것은 추리소설이다. 공포스러운 범죄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두뇌로 유입되는 혈류량의 변화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든다. 게다가 수수께끼를 풀기까지의 서스펜스와 알아맞혔을 때의 성취감은 무더위를 얼씬도 못 하게 한다. 이미 제시된 범행을 재구성하며 사건의 진상을 복원하려면 합리적 추론과 논리적 증명으로 독자를 납득시키는 탐정이 필수적이다. 추리소설을 개척한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서 처음 등장한 오귀스트 뒤팽 이후 셜록 홈스, 에큘 포와르 등 명탐정 계보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마블 영화에서 맹활약하는 슈퍼히어로와 같은 존재들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이경식 옮김·동서문화사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이경식 옮김·동서문화사

그러니 천재적인 통찰과 분석을 발휘하는 탐정 캐릭터들의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뇌게임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살인과 같은 범죄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바닥에서부터 대면하는 진지한 주제가 아닌가. 그래서 미국에서 나온 것이 ‘하드보일드(hard-boiled) 탐정’이다. 감상에 빠지지 않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사람이나 세계와 거리를 둔다. 하소연을 하지도,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서재에서 파이프를 문 사색가가 아니라 거리를 쏘다니면서 이것저것 쑤셔보는 행동파다. 범인을 찾아도 무너진 세계의 질서가 회복되기는커녕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될 것을 잘 알고 있다.

비정하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형이 미국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다. 장편 <기나긴 이별>에서 말로는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술주정뱅이 레녹스에게 호의를 베풀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새 친구의 얼굴은 젊은데 머리는 백발이고, 인사불성이지만 깨고 나니 예의가 바르다. 롤스로이스를 끌고 다니는 백만장자 부인은 바람둥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중압감에 굴절된 삶을 살고 있지만, 퇴폐와 관성에 젖은 하루하루에서 헤어날 마음은 없다.

‘일하지 않고 돈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테리의 일상에 갑자기 쓰나미가 몰려온다. 새벽에 귀가한 집에서 벌거벗은 아내는 얼굴이 짓이겨진 채 죽어 있다. 당황해서 말로의 집을 찾은 테리는 친구의 도움으로 멕시코행 비행기를 타고 도피한다. 누가 봐도 아내의 화냥질에 폭발한 살인이 명백하고 그렇기에 범죄자의 도주에 협조한 탐정은 경찰에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인 테리가 도피지에서 죽으면서 모든 것은 해결된다. 다시 사소하고 평범한 탐정 생활로 복귀하면 되지만 한번 깨진 삶의 질서를 말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이 나왔지만 납득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에 의해 모험이 시작된다. 의외의 인물들이 출현하고 시련과 고통이 수반되지만 불편한 진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주인공에게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아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누구나 이별을 통해 어른이 된다. 먼저 분리되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이 입사의례의 준칙이다. 고독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완숙(hard-boiled)한’ 탐정은 20세기 대도시의 피상적 인간관계에 대한 환멸과 단절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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