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골목-공시족에 의한, 공시족을 위한, 공시족 터전

김천 자유기고가
2020.06.29

서울 노량진역을 나서면 학원이 보인다. 대입재수학원부터 공무원 시험학원까지 학원의 수와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마치 젊은 시절의 대부분은 시험으로 보내야 한다는 듯 학원은 그렇게 노량진을 점령하고 있다. 정면에 우뚝 선 동작경찰서를 에워싸고 경찰직 공무원 학원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보통 수백 대 1을 넘어서고 있고,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노량진으로 향하는 이들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세상은 먹고살기가 어려워졌고, 미래는 불확실해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노량진 골목에는 늘 공시생들이 들고나간다.

노량진 골목에는 늘 공시생들이 들고나간다.

사법시험이 폐지되면서 신림동 고시촌을 전전하던 이들도 노량진으로 몰렸다. 입시시장에서 성공한 학원들이 공무원 시험시장에 눈독을 들여 노량진에 뿌리를 내렸고, 잘나가는 1타 강사들도 줄을 바꿔 섰다. 불황에 대한 두려움이 길어질수록 공무원이 되려는 이들이 늘어간다. 학원도 점차 세분화되어 영어·일어·중국어·공기업·임용고시·7급·9급·경찰공무원·경찰승진·군무원·부사관·법원·검찰직·교정직·소방공무원·기술직공무원·사회복지직·노무사·법무사·세무직·감정평가사 등 거의 모든 직군의 공무원 시험과 자격증에 덧붙여 승진시험 전문 학원까지 꼽을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다. 노량진 일대를 걷다 보면 우리나라에 취업 관련 시험과 자격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할 수 있다.

학원들은 저마다 최고의 합격률, 최선의 선택을 주장했다. 학원을 잘 고르는 일도 원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일의 첫걸음인 만큼 중요하다. 수요가 있으니 학원들은 점점 몸집을 불려 지금 유명학원 유명강사의 매출과 수입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순위권에 들어선 모 업체는 2018년 매출액이 4000억 원 이상으로 알려졌다. 노량진 빌딩에 간판을 단 거대 학원들의 매출은 쉽게 수백억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시장은 점점 커지고 학원들의 경쟁도 점차 치열해져 노량진 뒷골목 곳곳에도 광고판이 빽빽하게 붙었다. 사회에서 밀려나지 않고 안정된 직업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젊은이들만큼 학원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노량진 골목은 공시생을 위한, 공시생에 의한, 공시생의 골목이다.

노량진 골목은 공시생을 위한, 공시생에 의한, 공시생의 골목이다.

신림동 고시생들 노량진으로 몰려

학원의 강의 모습과 내용도 달라졌다. 강의실에 앉아 강사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필기하던 옛 모습에서 벗어나 인터넷 강의도 제공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한다. 맞춤형 공부 과정을 제시하는 곳도 있다. 강의를 들으면 연관 자료를 함께 제공한다. 아예 독학용 콘텐츠와 독학 공간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강사 쟁탈전도 치열하고 광고 홍보에 쓰는 비용도 늘었다. 이 바닥도 학생 빼오기와 평판 조작 등으로 시끄럽다. 인터넷상에서 댓글 조작으로 여론몰이를 하던 학원과 강사들이 벌인 꽤나 유명하고 시끄러운 송사도 있었다. 생존은 공시생들만큼 학원들도 절박한 상황이다.

지방에 집이 있어서, 또는 시험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등의 이유로 학원가를 둘러싼 주택가는 온통 고시원과 원룸, 공부방과 하숙집이 가득하다. 노량진 역전부터 상도동으로 올라가는 장승배기 어귀의 골목길에는 칸을 나누고 만들 수 있을 만큼 최대치로 방을 들인 고시촌이 됐다. 골목을 오가는 이들도 한눈에 고시생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했다. 여름엔 검은색 계열의 반소매 티셔츠와 반바지가 이 골목의 유니폼이다. 요즘엔 부사관과 경찰직 공무원 수험생을 대상으로 한 체육학원이 성업하고 있어 몸집 좋고 건장한 수험생들도 골목을 메우고 있다.

뒷골목에도 학원과 고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뒷골목에도 학원과 고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노량진 골목은 한마디로 공시족에 의한, 공시족을 위한, 공시족의 터전이다. 컴퓨터 가게는 ‘독서실용 소음 적은 컴퓨터’를 내놓고 있고 구둣가게 주인도 수학전문 일 대 일 지도교사를 소개한다. 문방구는 수십 종의 독서대를 갖춰놓고 있다. “법전을 올려놓으려면 크고 무거운 책을 버텨야 한다. 독서대만 20종이 넘는데, 시험 분야에 따라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이 문구점 주인의 이야기다. 암기를 위해 수없이 필기해야 하는 수험생의 필요에 따라 볼펜도 종류가 다양했다. 그는 “예전엔 일본제 볼펜이 잘 나갔는데, 요즘엔 국산 볼펜 중에서 특히 유행하는 제품이 있다”고 했다. 공시생들에게 인정받고 입소문을 타면 히트 상품이 되기는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서울서 노인들 동네만큼 물가가 싼 곳

공시생에 특화된 것은 문구점뿐 아니라 동네 구멍가게와 마트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 사이에서 확인되고 인정받은 상품만이 매대를 장악하고 있다. 슬리퍼와 실내화 하나까지도 같은 물건을 선호한다. “나름대로 공부에 최적화된 물건들이라 보면 된다. 오래 신어도 편하고 실내에서 소음이 안 나고 튼튼한데 더해서 가격이 싸야 사서 쓴다”고 말한다. 그렇게 공시생들의 까다로운 선택에서 살아남은 물건들은 노량진 일대 어느 골목 어느 가게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런 샴푸와 과자 따위들이 묶음 단위로 진열대를 채운다. 시험 외 일상의 작은 일 하나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 아니면 같은 길을 가는 이들의 선택을 믿고 무작정 따라가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집마다 방을 들여 공부방으로 내놓고 있다.

집마다 방을 들여 공부방으로 내놓고 있다.

서울에서 노인들의 동네만큼 물가가 싼 곳이 노량진이다. 노량진의 골목골목에 있는 식당들은 1990년대의 어느 한 시점에 가격대가 묶여 있다. 국밥이 4000원에서 5000원대, 아메리카노 커피는 800원에서 1000원. 찌개백반은 싼 곳은 3500원, 보통은 5000원이다. 컵에 퍼주는 수제 아이스크림은 2000원. 가장 ‘사치스러운’ 생선구이 정식은 7000원이다. 거기에 식권을 묶음으로 사면 가격은 더 내려간다. 분식 카페 주인은 “100원만 올려도 싸늘해진다. 뭔 짓을 하든 값을 맞춰야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과거 노량진을 대표하던 컵밥은 노점상 철거 이후 보기 힘들어졌다.

대부분의 고시원은 밥과 반찬을 제공하고 있다. 뷔페식으로 내놓는 곳도 있고, 기본 반찬에 별식을 따로 주는 곳도 있다. 고시원 또한 포화상태라 양에서 질의 경쟁으로 넘어갔다. 자식이 공부할 방을 알아보러 나선 부모가 업자에게 꼼꼼히 따져 묻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고시원 주인은 “25만원은 아주 싼 가격이다. 창문 있고 공부하기 조용한 곳은 흔치 않다”고 목청을 높였다. 고시원도 극과 극이라 싼값을 무기로 한 곳도 있고 그야말로 럭셔리한 분위기를 제공하는 만만치 않은 곳도 있다. 오래된 연립주택을 고시원으로 개조한 곳도 있고, 아예 통짜로 건물을 지어 올린 곳도 보인다. 고시원 말고도 공부방이란 간판이 붙은 집들도 볼 수 있다. 처지에 따라 숙식의 공간은 다양한 곳이 노량진 일대다.

문구점도 시험마다 최적화된 도구들을 취급하고 있다.

문구점도 시험마다 최적화된 도구들을 취급하고 있다.

내일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

낮에는 대부분 수업을 듣거나 공부를 하느라 노량진 골목은 대체로 고요하다. 간혹 오래도록 골목을 지켜온 토박이 노인이 문밖에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는 모습 말고는 돌아다니는 이들도 별로 없었다. 골목을 걷다 보면 유독 사람이 모인 곳도 있었다. 고시원이나 학원 후미진 한쪽에서 긴장의 시간을 내려놓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담배를 피워대는 공시생 무리도 보인다. 동시에 하늘로 오르는 연기와 붉은 불꽃이 공시생들의 타는 속내인가 싶다. 벽에는 ‘이곳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간입니다. 담배와 잡담을 금해주세요’란 벽보가 붙었지만 한 모금 피우지 않으면 시름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골목마다 노루목처럼 포인트가 있는 듯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골목골목 있는 술집과 노래방도 해가 지면 번성하는 곳이다. 공시생이라고 공부만 하진 않을 것이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업소도 다양하다. 그러나 가벼운 호주머니를 반영한 듯 술값·안줏값이며 노래방 이용료도 헐값이다. 동전노래방 5곡에 1000원, 1인실은 6곡 1000원. PC방은 한 시간 이용료가 500원이다. 정말 싸다. 홀로 내일을 향해 앞만 보고 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러니 외로운 이들끼리 눈맞는 일도 많고 더러 사고도 친다는 소문이 있다. 혼성스터디가 연애싸움에 풍비박산 났다는 뒷얘기도 흔한 곳이 노량진이다. 고독과 싸우다가 고독에 져버리는 일이야 세상사에 흔한 일이다.

공부를 하는 곳이니 골목마다 책방·헌책방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주변으로 복사와 제본집들이 줄줄이 있다. 밑줄 하나 없는 새책 같은 헌책을 헐값에 내어놓는 일도 있다. 고시원 주변을 살펴보면 분철한 교재가 버려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교재를 버린 주인은 시험에 붙은 것일까 아니면 포기한 것일까. 합격 발표철은 아니니 아마도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리라.

간혹 트렁크에 책과 옷가지를 싸들고 골목길로 접어드는 젊은이도 볼 수 있고, 더러 살짝 무너져 내린 어깨 짓을 하고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돌아가는 모습도 보인다. 늘 새롭게 꿈을 세운 이들이 들어오고 한편에선 야망을 접고 무겁게 돌아가는 이도 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 그어진 선 하나를 흔들리며 오가야 하는 곳이 노량진 골목이다.

노량진엔 공무원 학원뿐 아니라 사육신의 묘역도 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한 죄로 목숨을 잃었던 성삼문 등이 묻힌 곳이다. 본디 버려지고 그 무덤에 묻힌 시신조차 온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역의 죄를 입기 전 그들은 가장 잘나가던 당대의 출세객들이었다. 노량진을 오가는 젊은이들이 꿈꿨을 공무원 시험에 최고 점수로 합격하고 공직에서 승승장구했으나 줄을 잘못 선 대가로 명과 집안마저 박살이 났다. 출세란 빛도 있지만, 그 무거운 어둠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노량진 뒷골목엔 아직 고시원으로 고치지 않은 고요한 주택가가 남아 있다. 가파른 비탈이기도 하고 아직 그 집을 애착하는 주인들이 살아 있기도 하여 살림집 골목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담을 넘은 꽃나무들을 살펴보니 꽃이 다 져버렸다. 분명 꽃으로 화려했을 텐데 나무는 시침을 떼고 계절의 옷을 바꿔 입었다. 이 앞 골목을 오가는 젊은이들. 인생의 봄날 청춘을 지나고 있을 것이나 어느 사이 꽃도 보지 못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량진 골목을 오가는 젊은이들이 모두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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