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도쿄 20대 청년 다섯 명의 슬픔과 고독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20.06.08

요시다 슈이치는 보통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을 아우르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우선 <퍼레이드>로 제15회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한 2002년 <파크 라이프>로 127회 아쿠타가와상까지 거머쥔 이례적인 수상 경력에서 비롯된다. 야마모토 슈고로상이 대중소설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 데 반해 아쿠타가와상은 순수문학에 수여하는 상으로 둘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력이 상징하는 바 그대로 요시다 슈이치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주로 연애소설과 범죄소설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그는 장르로 재단할 수 없는 작가이기 이전에 인간 심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토대 삼은 대중소설가라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 한국어판 표지 / 은행나무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 한국어판 표지 / 은행나무

그의 뿌리라고 할 만한 <퍼레이드>에서도 그 단초는 여실히 드러난다. 도쿄에 있는 셰어하우스를 배경으로 20대 청년 다섯 명의 공동생활을 그려낸 이 작품은 겉으론 가벼운 코미디인 양 도쿄 청춘들의 트렌디 드라마를 가장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두운 마음속의 그림자 또한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도쿄의 사립대학에 진학하며 상경한 요스케는 다른 이에겐 어쩐지 바보처럼 보이기 십상인 느긋한 성격에 머릿속엔 온통 선배의 애인과 잘해볼 생각뿐이다. 인기배우로 발돋움한 남자 친구의 전화만 기다리며 두문불출하는 고토미의 일상은 ‘잉여인간’ 그 자체다. 잡화점에서 일하는 미라이는 날마다 만취해 귀가하는 게 일상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스물여덟 살 나오키만큼은 독립영화사에 일하는 건실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음험한 욕망에 짓눌린 인물이다. 이들 넷은 어느 날부터 당연하다는 듯 같이 숙식하게 된 열여덟 살 사토루를 두고도 요스케의 후배겠거니 싶어 방치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미라이가 술김에 데려온 아이였을 뿐이다. 정말이지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한심한 인생들이다.

동거인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각 챕터의 제목 그대로 이야기는 각 캐릭터에게 번갈아 시선을 할애하고, 그런 와중에도 이들의 공동생활은 시종 유쾌한 톤을 유지한다. 수상한 옆집이 실은 매춘을 알선하는 것 아닌가 의심해 굳이 시간과 돈을 써가며 내막을 캐질 않나, 고장난 TV를 두고도 새것을 사기는커녕 누가 더 잘 두드려 고치나를 두고 경쟁을 벌이기 일쑤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일상으로 내내 눙치다가도 각 인물의 챕터로 들어가는 순간 결코 드러내지 않았던 각자의 고뇌와 충동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리고 각 인물의 속내가 드러날 때마다 깨닫게 된다. 이들 모두는 한껏 좋은 친구를 가장해 모든 생활과 과거까지 공유하며 진득한 우정을 쌓아가는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서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직 열여덟 살이라며 어린 사토루를 걱정하지만, 그가 어떤 ‘밤일’을 하는지까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얼핏 완벽해 보이는 이들의 동거조차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스케는 졸업하면 곧바로 귀향할 생각이고, 미라이는 충동적으로 하와이에 정착하고자 한다. 실은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뿐이라는 흔한 메시지로 수렴되는 듯하더니 이마저도 뒤엎는 충격적인 범죄를 통해 결말부에선 기어이 격렬하게 폭발하고야 만다.

청춘들의 무책임한 일상을 코믹하게 나열하는 사이 조금씩 내비치는 도시 청춘들의 슬픔과 고독은 유쾌한 기운 덕에 오히려 음습한 느낌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은근한 코미디를 앞세우지만 불온한 암시처럼 자리한 ‘가면놀이’가 작품 어디에건 절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대중소설가 야마모토 슈고로가 “문학에는 순(純)도 불순(不純)도 없으며, ‘대중’과 ‘소수’도 없다. 그저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뿐”이라고 했던 대로, 실로 인간의 심연으로 뛰어든 ‘좋은 소설’의 표본과도 같은 작품이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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