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썰록-익숙한 한국 고전문학과 좀비의 이종교배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2020.04.13

조지 로메로 감독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서 훗날 ‘좀비’라 명명되는 이형적 존재를 소환한 것이 벌써 52년 전 일이다. 하지만 영화 <부산행>(2016)이 1100만 관객을 모으기 전까지만 해도 이 땅에서 좀비는 꽤나 낯선‘괴물’이었다. 끽해야 호러 마니아들의 괴상한 전유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로메로 감독이 <시체들의 새벽>(1978)에서 소비만능주의에 중독된 이들을 대형 쇼핑몰 안에 갇혀 비척거리는 시체로 전시한 이후, 좀비는 호러 장르 밖으로 마구 뛰쳐나갔다. 자아도 의지도 없이 움직이면서도 끊임없이 살아 있는 인간의 피와 살과 뇌를 탐하는 존재라니, 어쩐지 실존한다기보다는 실존주의에 대한 은유로 보이기 충분했던 탓이다. 게다가 한 명이 두 명이 되고, 두 명이 곧 네 명이 되는 전염성은 인류가 종말로 향하는 와중 맞닥뜨릴 가장 효율적인 시나리오로 보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오늘날 좀비는 재난 영화로, 종말물로, 코미디로 심지어 로맨스와 역사극으로까지 진출했다.

김성희˙전건우˙정명섭˙조영주˙차무진 작가의 <좀비 썰록> 표지

김성희˙전건우˙정명섭˙조영주˙차무진 작가의 <좀비 썰록> 표지

그중 최근의 새로운 성과라 하면 대부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 조선시대에 좀비를 풀어놓고‘왕좌의 게임’을 벌인 것을 첫손에 꼽겠지만, 익숙한 한국 고전문학을 좀비와 이종교배한 <좀비 썰록> 또한 이에 못지않은 소설집이다. 다섯 작가의 앤솔러지 <좀비 썰록>이 좀비의 무대로 선택한 한국문학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김시습의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황순원의 <소나기>다. 의외의 포진부터 우선 흥미를 돋우지만, 교과서에도 실린 이 작품들 어디에 좀비가 비집고 들어갈지 의아해하던 순간 좀비와 결탁해 원작을 전복하는 재기는 더욱 눈부시다. 일찍이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가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장르 전복에의 쾌감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 모양새다.

국어 수업 시간, 교사가 학생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형식으로 구성된 <관동행>은 정철이 관동 관찰사로 부임하는 내용이 담긴 <관동별곡> 도입부에 조선 전역에 창궐한 좀비의 뒷이야기를 덧댄다. 좀비가 가까이 오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정 대감이 자신의 까다로운 미각을 무기 삼아 식솔들과 함께 좀비 치료제인 김치를 만들기까지의 우여곡절이 시종일관 흥미로운 너스레처럼 이어진다. <만복사 좀비기>는 본디 명혼소설(冥婚小說)인 원작의 귀신 자리에 좀비를 갖다놓고, <피, 소나기>는 죽은 소녀가 소년과의 한때를 기억하지 못한 채 부활해 다시금 어른들의 눈을 피해 소년과 기이한 추억을 쌓는 과정을 원작의 톤을 빌어 아련하고도 그로테스크한 감각으로 형상화한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현대판이자 좀비 버전, 결말부에선 아예 후신을 자처하는 조영주의 <운수 좋은 날>의 예측불허 패러디와 위트도 무척 즐겁다. 특히 전건우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에서는 시댁과 시대에 억눌렸던 옥희 어머니가 차츰 욕망의 화신으로 거듭나더니 좀비가 출현하면서부터는 아예 익숙한 원작의 기저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마침내 승리자로 거듭난 옥희 어머니가 낫으로 좀비들의 목을 뎅겅뎅겅 쳐내는 클라이맥스는 가히 이 단편집의 성격과 장점을 가장 극명히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아직도 새로운 게 남아 있을까 싶을 때마다 새로운 무대, 새로운 장르로 진출하는 좀비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이것이야말로 쉼 없이 세를 늘리는 좀비의 본성인가 싶다. <좀비 썰록> 역시 자그마한 아이디어를 참신한 기획으로 확장하고 숙련된 작가들이 정련해 또 한 번 새 영지로 나아갔다. 진짜 역병이 창궐한 우리 시대, 앞으로 좀비는 또 어디에서 어떻게 출몰하려나.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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