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화가 40년 김봉준 “민중세상, 섭섭하지만 행복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사진·김정근 선임기자
2020.03.02

그는 언론에 단단히 화가 났다.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다 보냈는데도 기자 한 사람 오지 않았다. ‘민중미술’이란 장르를 열어 40년간 지속했다. 자신의 작품이 바로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역사라 자부했지만 진보언론조차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화가 김봉준(66)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민중미술’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 용어를 처음 만들고, 그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밀린 숙제’ 하는 심경으로 2월 11일 그를 만났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중화가 40년 김봉준 “민중세상, 섭섭하지만 행복했다”

-최근 전시회(2019년 12월 18~30일) 제목이 ‘민중미술 공감의 연대’로 김봉준 화백의 40년을 결산하는 의미인 것 같다.

“정권이 바뀌고 촛불정부라서 공공미술관에서 민중미술 40년을 정리해주길 기대했지만… 전혀 초대해주지도 않고… 개인 갤러리(갤러리 미술세계)에서 정리해준다고 해서 했다. 3개 층에서 ‘김봉준 미술 40년 아카이브전’, ‘평화선언 인물전’, ‘붓굿’ 세 섹터로 전시했다.”

-1979년 민중미술을 시작해 2019년까지 40년을 결산했다. 어떤 계기로 민중미술을 시작했나.

“대학 때 조소를 전공했다. 서클 활동으로 탈춤·풍물을 열심히 하다 보니 ‘미술에도 탈춤이나 풍물이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이 들었다. 공부해 보니 우리 미술도 고구려 벽화부터 불화·민화·풍속화·진경산수화 등이 맥을 잇다 일제강점기에 서양에서 배운 기법을 한국화라 가르치면서 우리 그림 맥이 끊어졌다. 나는 스님에게 불화를 3년간 배우면서 끊어지는 우리 미술 끝자락을 붙잡았다.”

-민중미술이란 용어는 80년대 중반까지 생소했다. 지금도 예술성 부족이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에 적용되는 종북프레임이 예술계에도 적용된다. 우리를 순수하지 못하다, 심지어 빨갱이 그림이라고 매도하는 사람이 있다. 이에 우리는 ‘예술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응수한다. 삶과 분리된 예술, 소수 전공자들이 미술관에 모셔놓고 보는 것만 예술이라면 어떻게 민중과 소통하겠냐. 그들과 미학 자체가 다르다.”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는 미술”

그는 “민중미술은 민중의 삶에서 살아 있고,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는 미술”이라고 정의한다. 1985년 책 <민중미술>을 내기 전까지 ‘산 그림’이라는 용어를 썼다. 따라서 그의 미술작품을 시대별로 보면 우리 민주화운동 40년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1979년부터 1980년 초반에는 ‘기억의 가족’, ‘어머니 돌아왔어요’, ‘엄마와 두 아이’, ‘추수’ 등 가족·모정·풍물 등이 주된 작품 소재였다. 1982~1985년은 ‘해방의 십자가’, ‘4월의 노래’, ‘난장’, ‘통일해원도’ 등 노동·농민·통일운동이 주된 소재다. 1988~1992년 노동자와 같이 생존하던 ‘흙손공방’ 시대는 풍물 소재인 ‘겨레의 춤’이나 노동해방을 그린 ‘해방의 그 날까지’, ‘총파업 투쟁’ 등을 그렸다.

1992년 문민정부 이후 작품인 ‘페르시아기행’, ‘아시아 문명’, ‘유목민의 이주’, ‘아시아 문명’ 등 여행이 소재로 등장하고, ‘마당놀이’, ‘겨울이야기’ 등 생태 작품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2000~2008년에는 ‘어버이 대지 신화상’, ‘바리데기’, ‘고구려 신화’, ‘신화이야기’ 등 조각작품과 신화를 소재로 한 회화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2016년 촛불혁명은 다시 그를 ‘민중현장’으로 옮아갔다.

촛불정부임을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는 11m가 넘는 대형 촛불집회 그림을 청와대에 걸었다. 이 그림의 작가는 강단(대학)에서 활동하며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는 민중미술가다. 이런 민중미술가 작품은 재벌 미술관이 소장하고, 일반인도 수천만원 선금을 주고도 2~3년 작품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이에 그는 “상업화랑에서 판매되는 민중미술가는 대여섯 명뿐”이라며 “그것이 민중미술의 성공이라면 할 말이 없다. 나는 그 길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약간 분노도 서려 있었다. 그는 “민중미술은 민중과 함께 소통하고 민중의 의식을 배신하지 않고 함께한 정신이 얼마나 살아 있나를 항상 물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모더니즘 계열의 민중미술과 달리 벽화·불화·민화·풍속화 등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화가다. 민중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고구려부터 1000년 넘게 이어진 작품에 숨은 비의(秘意·숨어있는 의식)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전통의 내림’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작품이 불화와 신화·목판화·걸개그림으로 상징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해 열린 ‘민중미술 40년 아카이브전’에서 김봉준 화백이 1985년 작품 ‘별따세’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해 열린 ‘민중미술 40년 아카이브전’에서 김봉준 화백이 1985년 작품 ‘별따세’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목판화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1979년 대학 4학년 때 만든 그의 첫 작품 ‘기억의 가족’도 목판화다. 그는 “우리 붓 작업으로 그림을 그리고, 목판에 조각해 한지에 찍었을 때 그림·목판·한지 3가지 맛이 어울리는 우리식 목판화 양식을 만들었다”면서 “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고, 민중적 힘의 질박한 맛을 느끼고, 쉽게 찍어 나눠줄 수 있는 소통의 장점 때문에 많은 작가가 목판화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한 미술평론가는 ‘간결하고 담백한 충격, 단순한 선의 경건한 절박감, 이러한 표현 형태에 내재된 원초적 감수성의 풍요로움과 개성적 표현’이라는 글로 목판화를 예찬했다.

목판화의 새로운 장르 개척

대중에게 널리 확대된 민중미술에도 불구하고 그의 민중미술은 미술계에서 여전히 ‘외면’받고 있다. 화랑을 통한 작품 유통이나 미술관의 전시·소장도 거의 없다. 그는 그 원인을 일제강점기부터 계속된 카르텔을 꼽고 있다. 제도권 화랑과 미술 교육계, 여기에 언론도 한몫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수십 년간 모더니즘을 교육하고(받고), 유통(팔아주고)하고, 기사 쓰며 같이 산 카르텔에 우리는 들어갈 수 없다”면서 “정치가 여의도 문법에 갇혀 있다 개표 때 깜짝 놀라듯, 민중예술의 깊은 미학을 기성 카르텔이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최근 경기도미술관에서 ‘시점時點·시점視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2019. 10. 29~2020. 2. 2)을 열어 위안이 됐다. 그는 “미술사에서 잊힌 인물로 알았는데 그래도 권력이 바뀌니 처음 전문 미술관에서 작품을 조명받았다”고 말했다.

김봉준 화백은 1954년 서울 출신으로 용산중·고를 나와 1976년 홍익대 미대에 진학했다. 군 출신으로 엄격했던 부친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그는 문학·철학·예술을 좋아했다. 그는 “미술 외에 별로 할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홍대 조소과에 들어간 그는 당시 유행했던 탈춤반에서 탈춤과 풍물에 빠졌다. 1977년 동일방직 여공 실태를 고발하는 공연으로 경찰에 끌려가 구류 25일 처분을 받았다. 첫 철창신세였다. 당시 이항녕 총장이 ‘학사 징계하지 말라’고 해 겨우 제적은 면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비판적 계간지와 단행본 출판으로 이름 높은 ‘창작과비평사’에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그리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졌다. 그는 “당시 아무 언론도 광주 참상을 보도하지 않을 때 <창작과비평> 독자들이 ‘광주가 어떻게 되냐’는 전화 문의가 빗발쳤다”면서 “광주 실상을 알렸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수배명단에 올랐고, 회사에서 준 3개월치 월급으로 11개월간 도피생활을 했다. 1981년 계엄이 해제되고 자수해 또 한 달간 철창신세를 졌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민중운동에 뛰어들었다. 1982년 기독농민회 홍보간사로 그는 “책을 읽지 않는 농민을 의식화시키기 위해 만화책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만화책으로 다시 도피자 신세가 됐고, 결국 배종렬 당시 기독농민회장이 ‘대표’로 구속됐다.

그는 1983년 ‘미술동인 두렁’을 결성해 민중미술의 원조격인 ‘산 그림’ 운동을 시작, 1985년 11월 민중미술편집회 이름으로 단행본 <민중미술>을 출간했다. 민중미술이라는 고유명사가 처음 사전에 오른 것이다.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기획국장으로 각종 집회에 노래·그림패를 지원하다 세 번째 철창신세를 졌다. 그는 이렇게 3번의 철창신세를 졌다. 여기에 그는 원치 않는 ‘해외추방’ 경력도 있다. 1987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민주화운동 분위기를 해외에도 돋우기 위해 사람을 파견한 것이다. 그는 10개월 동안 미국과 독일을 돌면서 백악관 앞에서 한국 민주화 지지시위를 하고, 교포를 상대로 전시회를 열고 풍물패를 소개했다. 그는 “미국에서 분단의 심각함과 통일의 절박함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외가 8명이 이북출신이다.

“민중미술은 여전히 비주류다”

그는 1987년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한 ‘6·29 항복선언’ 이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귀국했다. 그러나 ‘1노3김’이 대통령에 나서는 야권 분열상황에서 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87년 대선 결과는 ‘죽 쒀서 개 줬다’는 실망과 좌절이 컸다”면서 “하방하는 심경으로 경기 부천에 가서 노동조합을 돕는 문화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운동 한쪽에 ‘흑손공방’을 열어 노조가 의뢰하는 머리띠·걸개그림·현수막·기념판화 등을 제작하며 살았다. 그는 “그렇게 먹고사는 것이 상업화랑에서 유통되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탄압으로 노동조합이 와해되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그도 병이 들었다. 암 3기였다. 1993년 의사를 하는 선배 소유의 원주 문막 야산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나중에 돈을 벌어 선배의 땅 일부를 사 지금 신화미술관을 세웠다”면서 “그 선배가 나의 큰 후견인이었다”고 말했다. 문막에 있는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은 국내 최초·유일의 신화테마 미술관이다. 창세신화부터 마을신화·건국신화·토템신화·동이문명신화 등 신화와 관련된 회화와 조각작품을 전시하고,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김 화백은 동북아평화연대에서 활동하며 신화미술관과 고려인과 평화운동에 천착했다. 박근혜 정권에서도 그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무려 40년간 지속된 천형이었다. 그는 촛불혁명을 통해 본래 민중미술을 발견했다. 그는 “촛불시위에 나서는 민중의 피켓이나 캘리그래피, 특히 가장행렬이나 마스크 시위, 그룹별 퍼포먼스가 바로 민중예술”이라며 “시민이 예술가라는 자각은 바로 민중이 예술의 주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촛불시민혁명도’ 1·2·3·4를 통해 광화문 촛불 현장을 그렸다. 광화문 깃발은 민주노총·전농·참교육(전교조)·민가협·민예총·문화연대 등 촛불혁명의 주역이 명확히 묘사돼 있다. 또 세월호 아픔을 기록한 ‘세월호 신화’, 백남기 농민이 숨진 민중총궐기를 기록한 ‘명박산성을 너머’, 박근혜 퇴진을 축하하는 ‘역사풍속화-승리의 날’ 등의 작품을 쏟아냈다. 그는 또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감격을 보고 ‘4·27평화선언 인물 붓그림전’을 가졌다. 인물 그림에 평화메시지를 넣는 연작이다. 그는 “4·27 남북공동성명 지지하는 지식인의 평화메시지 받아 200명 정도 그렸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봉준호 감독은 멋지게 그것도 미국 한복판에서 큰 상을 흔들며 주류에 진입했다. 김 화백의 민중미술은 1992년 문민정부, 1997년 평화적 정권교체, 그리고 2017년 촛불정부를 만들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나.

“나는 40년 블랙리스트이고, 비주류 40년이다. 아예 제도권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전두환 독재투쟁에서부터 광화문 촛불혁명까지 민중과 함께했지만 민중미술은 여전히 비주류다.”

-촛불혁명의 주역들은 자신이 소외됐다고 자탄하는 사람이 많다.

“맞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만 여야 신분이 바뀌었을 뿐 소수 정치인과 몇몇 세력만 권력을 향유하는 세상이다. 검찰·관료·재벌·상업화랑 등 과거의 거대한 카르텔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 사회에 말하고 싶은 것은 뭔가.

“세상에는 우리와 같은 창조적 비주류가 있어야 한다. 그 창조적 비주류가 얼마나 주류로 흡수될 수 있느냐가 사회의 유연성이다. 그나마 고마운 것은 많은 동지가 이름도 없이, 빛도 못 보고, 병들어 죽어갔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고, 그나마 그림이라도 남았다. 민중과 함께한 40년은 행복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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