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피해자의 치유와 일상의 회복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2019.12.02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서 ‘평범한 삶’ 꿈꾼 그들 기억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생전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시민이나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즉각 “일본 정부의 사죄”라는 답이 나온다. 물론이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반인권 제도를 창출하고 시행한 공권력은 스스로 피해실태를 규명하고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 그 진심이란 국가폭력의 근절 의지를 보여주는 조치들을 통해서 나올 테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별세한 공점엽, 이수단 할머니의 영정이 놓여 있다. / 서성일 기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별세한 공점엽, 이수단 할머니의 영정이 놓여 있다. / 서성일 기자

그런데 나의 질문은 그보다 앞선 소원을 묻는 것이다. 피해 여성들이 생전에 정말로 바랐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위안부’로 끌려가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된 후에야 자신의 피해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평범한 삶’에 대한 결핍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 석 자를 가진 평범한 여인으로서의 삶. 이는 삶의 과정에서 겪어보지 못한 결혼이나 임신·출산 등으로 구체화되기도 했다.

삶의 과정에서 박탈당한 일상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 보면, 이 여성들이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박탈당한 일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통제하거나 주변과 타협하면서 자율적으로 꾸려가는 일상 말이다.

모든 것은 위안부란 ‘낙인’에서 비롯됐다.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은 과거 위안부였던 여성들의 일상에 대해서 상상하지 못했다. 행복한 결혼, 떳떳한 어머니, 공존하는 이웃, 분노하는 피해자 등 우리가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상상하는 일상이 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상상력이 없는 공동체 안에서 피해 여성들은 존중을 요구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스스로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나름의 일상을 지키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 여성 주변에 온통 이들을 손가락질하고 공격하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 캔 스피크>나 <동백꽃 필 무렵>처럼 소외된 사람에게 ‘사람이 희망’이란 영상 콘텐츠들이 인기가 높은 것을 보면 용기를 내고 트라우마를 넘어 피해자와 함께하는 일상을 꿈꾸는 것이 결국 사람의 본성이라는 생각도 든다.

전쟁 후 태국에 남은 노수복은 결혼한 지 10년이 되어가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남편을 설득해 ‘작은집’을 맞도록 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노수복으로서는 이른바 정상 가족에 대한 염원이 있었던 듯싶다. 펄쩍 뛰던 남편은 결국 아내의 부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작은집’은 3남매를 낳았고, 노수복은 ‘작은집’과 함께 아이를 기르는 재미에 새로운 행복을 느꼈다.

전쟁 후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에 남은 하상숙은 1950년대 말부터 이 지역 조선인들의 모임인 학습동아리를 이끌면서 같은 조선인 피해자들을 챙겨왔다. 그중 한 명인 홍강림과는 사돈을 맺기도 했다. 하상숙의 중국인 남편은 위안소에 있었다는 아내의 고백에 “그건 옛날 일이다”라고 했다. 하상숙은 남편이 내게 잘했으니 내가 의붓딸들에게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국적 회복도 하고 2003년 영구 귀국도 해보았지만, 딸들이 보고 싶어 2005년 다시 중국에 돌아가 살았다.

내가 2004년 3월 피해조사를 위해 경남 산청의 석복달을 찾아갔을 때, 미리 마중 나와 있던 담당 공무원은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알까봐 석복달이 무척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느냐?”고 물으니 사실은 모두 알고 있는데 본인이 꺼리니 모르는 척하고 있단다. 우리는 누가 볼세라 조심조심 찾아가 면담을 했다. 의지하는 담당 공무원이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석복달은 담담한 표정으로 중국 광둥에 끌려가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위안소의 전화번호도 기억하고 있었고, 군인이 불평하면 업주가 자신을 엎어놓고 등을 때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조심스러웠지만 비교적 평온하고 순조로운 면담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석복달의 피해를 알고 있으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고 그의 일상을 지켜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피해자와 주변 사람들 잊지 말아야

중국 랴오닝성의 하이청 지역에 끌려갔다 온 공점엽은 전쟁이 끝난 뒤 고향인 전남 해남으로 돌아왔다. 20세 연상의 남자와 연을 맺고 아이도 낳았다. 위안부 생활 탓에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아이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마을에서 당골(굿 해주는 사람)을 하면서 소원이나 해원을 비는 동네 사람들과 바쁘게 왕래하며 지냈다.

과거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점엽의 일상은 비틀리지 않았다. 아들은 엄마의 피해 사실을 알고 “어머니 고생하셨소”라고 했다. 2016년 5월, 공점엽이 작고한 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꽃상여를 마련해 그를 태워 보냈다. 곱고 예쁘게 보내주는 것이 공점엽이 마지막 가는 길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국제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성노예’ 제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피해자들이 위안소에서 자유와 자율권을 박탈당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병사의 성병 예방과 ‘성적 위안’, 현지 치안을 위해서 위안소가 필요했고, 여기에 끌려온 여성들은 사람이 아니라 군수품으로 취급당했다. 따라서 피해자에게 일상의 자유와 자율을 박탈하고 성을 착취해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봉쇄한 아시아·태평양 전쟁기의 국가폭력은 엄중히 따져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피해자들은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일상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살아남았다. 생존해 자신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서 자신들을 기억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피해자가 자기 일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지지해준 주변 사람들이 있다.

2019년 현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대응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부정론자들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다. 위안부로 끌려가기 이전으로 피해자를 돌려주지 못하는 우리는 피해자들의 다음 소원, 명명백백하게 진상을 규명해 가해자는 대가를 치르고,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내가 바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자 평생 투쟁했던 피해자들과 그들과 갖가지 관계를 맺었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 여성들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란다. 그들이 당신에게 와서 꽃이 될 것이며 당신의 삶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그간 글을 쓰면서 할머니라는 호칭을 애써 피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무엇보다 할머니라는 호칭으로 내가 피해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할머니 이후의 삶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피해 여성들의 삶과 바람을 상상하기를 바랐다.

※‘알려지지 않은 위안부’ 시리즈는 이번 8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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