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이야기는 문서 너머 어디에나 있어
신뢰할 만한 문서자료가 뒷받침되어 입증된 역사일수록 ‘진짜’에 가깝다는 믿음이 있다. 물론 역사 쓰기의 첫 출발은 관련 자료수집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위안부’, ‘위안소’라는 검색 키워드에 딱 맞는 자료 발굴에 큰 박수를 보내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피해자 중심의 위안부 역사 쓰기에 ‘독’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 우익세력이 내세우는 무기는 일본의 공권력이 위안부 강제동원에 직접 가담했다는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대응세력은 여기에 반응했고, 해당 문서의 발견 여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쟁점이 되어버렸다.
기록에서 찾은 수많은 범죄의 증거
그러나 공권력의 ‘공인과 은폐’라는 이중전략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속성이다. 일본군이 공공연하게 위안소를 이용하되, 전쟁터에 위안소가 있다거나 여성들을 속여서 끌고 간다는 풍문은 육군 형법 등으로 처벌했다. ‘위안소’, ‘위안부’라는 말부터 은폐된 용어였다. 이보다 흔하게 쓰인 말이 ‘육군오락소’, ‘특별요리점’, ‘예기’, ‘작부’, ‘특요원’ 등이다. 위안부 당사자조차 위안부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누구보다 위안부라는 존재를 지우고 싶어했던 사람은 피해 여성들이다. 연합군의 포로가 된 여성들은 자신을 노동자나 종업원이라고 밝히기도 했으며, 전쟁 이후를 살아가는 동안 피해보다는 수치로 독해되는 자신의 당시 경험을 최대한 숨기려 했다. 위안소는 이용자에게 허가된, 피해자에게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수치의 공간이었다. 전쟁 이후 여러 기억의 각축 속에서 위안부 제도의 역사는 풍화되는 듯했다.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제도 범죄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991년 김학순의 공개증언 이후, 위안부의 역사는 전쟁과 식민지 책임의 역사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피해자의 관점 위에 선 사람들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위안부와 관련된 기록 속에서 수많은 범죄의 증거들을 읽어냈다. 이전의 기록은 피해자 및 목격자의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새로운 기록으로 탄생했다.
주민 5만2000명이 살고 있던 오키나와 미야코섬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3만명이 들어왔다. 섬 전체는 일본군의 요새가 되었고, 군 주둔지 주변에는 위안소 17개가 설치되었다. 미야코섬 주민들은 위안소에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일상 속에서 위안부들과 자주 부딪쳤다. 멀리서 위안소 앞에 줄 서 있는 병사들을 본 적이 있었고, 때로는 오가며 위안부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물이 귀했던 미야코섬에서 우물물을 길으러 다니는 위안부와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흔한 풍경 중 하나였다. 미야코섬 사람들은 우물까지 가는 것이 허용된 위안부들이 가진 ‘잠깐의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강제가 아니다’라는 말과 연결짓지 않았다.
미야코섬의 요나하 히로토시는 소년 시절 집 근처에서 자주 봤던 조선인 누나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빨래를 하기 위해 우물과 위안소를 오가던 조선인 위안부는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는 했다. 소년 요나하의 눈에 그 사람은 ‘앗바라기 누나’였다. ‘앗바라기’는 아름답다는 뜻의 미야코섬 사투리다. 2006년 바위 사이에 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할아버지 요나하는 일본군 위안소를 연구하기 위해 미야코섬을 방문했던 유학생 홍윤신을 우연히 만났다. 이야기를 공유한 한국인·일본인·오키나와 인들은 2008년 9월 7일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를 세웠다. 요나하의 바위는 그대로 ‘아리랑비’가 되었다. 그 뒤에는 새롭게 추모비 ‘여성들에게’를 건립했다. 추모비에는 피해자의 아픔을 나눔으로써 전 세계의 성폭력이 그치고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바라는 내용을 새겼다.
문서자료로는 찾아내기 쉽지 않아
예부터 ‘트럭섬’이라 불린 중부 태평양의 축섬에는 연합군이 작성한 여성 26명의 명부가 있었다. 연구자들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직업란에 모두 노동자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섣불리 위안부와 연결할 수 없었다. 2017년 위안부 자료를 수집하던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축섬 주둔 미군의 전투일지 사이에 삽입된 여성들의 사진을 발견했다. 1946년 1월 17일 귀환선을 타는 날, 간호사 제복처럼 보이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꼼꼼하게 짐을 챙기거나 이동을 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당시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나는 한국정부의 피해등록자 240명 중 ‘도라쿠도’에 끌려갔다는 여성 한 명을 발견했다. 대구에 살다가 2008년에 작고한 이복순이었다. 생전의 이복순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 아들과 대구지역의 활동가가 사진 중 한 사람을 짚으며 이복순이 틀림없다고 했다. 전송해준 80세의 이복순 얼굴은 사진 속 20세의 여성과 겹쳐지는 얼굴이었다.
동일인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사람들을 설득할 만한 근거가 더 필요했다. 명부를 검토하니 ‘히토가와 후쿠준’, ‘대구부’라고 표기된 여성이 있었다. ‘후쿠준’은 ‘복순’의 일본식 발음표기다. 창씨명이 ‘히토가와’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호주제가 폐지되기 이전 여성의 뿌리는 제적등본을 추적해야 한다. 남편과 전남편의 호적은 나왔지만, 부친이 호주로 있는 호적은 아무리 해도 전산상으로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부친의 호적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산 검색에 한계를 느낀 이복순 생전 거주지의 면사무소 직원이 오래된 종이자료를 하나하나 확인해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고 했다. 그리고 전산상에는 입력되지 않은 이복순 부친의 개명 전 이름을 찾아냈다. 추적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찾아낸 부친의 창씨명은 히토가와. 1946년 1월에 20세의 이복순이 미군에게 불러준 이름과 주소가 일치했다. 기억과 이야기를 기초로 문서를 다시 독해해 위안부 역사를 새롭게 기록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외면 또는 은폐하고 싶었던 위안부 이야기는 문서자료를 통해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발견한다 해도 주로 피해자를 상대화하는 문서상에 기록돼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축섬의 조선인 위안부 이야기는 결정적인 문서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인 이복순의 존재가 있었고, 그의 이야기를 조각조각 뒷받침한 사진과 문서가 있었으며, 그 이야기를 함께 맞춰나간 사람들의 기억과 노력이 있었다. 문서에 의지하기보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주려는 듣는 이의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들의 의지에 따라 계속 역사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