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인터넷으로 주고받는 정보는 마치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는 양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자원을 소모하여 만들어낸 전기에너지와 기술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들어간 인간의 노동이 없었다면 열리지 않았을 결실이다.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전공하다 보니, 가끔 과학기술과 관련된 물건의 감정에 참여하기도 한다. 몇 해 전에는 한국 컴퓨터 산업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소프트웨어의 초창기 버전 패키지를 볼 기회가 있었다. 여러 장의 플로피디스크가 빠짐없이 담겨 있는지, 포장에 큰 흠은 없는지, 설명서는 유실되지 않았는지 등을 살펴보다가 문득 그 패키지는 출시된 지 25년이 넘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보관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플로피디스크의 수명은 짧으면 10년이고 길어도 20년을 넘지 않는다. 플로피디스크 표면의 자성체에 자기장을 걸어 특정한 방향으로 정렬하여 정보를 기록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성체의 배열이 서서히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가치가 높은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문화재로 지정한다고 해도 그 패키지 안의 디스켓을 컴퓨터에 읽혀 소프트웨어를 정상적으로 설치하고 실행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소프트웨어 패키지가 외형이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해도 그 안에 실제로 소프트웨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본질이 날아가 버린 껍데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보화사회의 정보는 어디에 존재하나
소프트웨어라는 존재의 본질이 디스켓과 같은 물질적 매체가 아니라 거기 담긴 정보 그 자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문화재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인터넷 어딘가의 ‘고전 프로그램 자료실’ 같은 곳에 저장되어 있을 소프트웨어의 사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진본성이나 희소성 같은 전통적인 문화재의 가치를 부정하는 입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의 문화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정보’라 해도 역시 물질적 바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눈앞의 플로피디스크에 담겨 있지 않다뿐이지, 인터넷 자료실의 소프트웨어 또한 해당 서버의 하드디스크에 정렬된 자성체로서 존재한다. 우리가 클라우드나 가상공간 같은 말을 익숙하게 쓰다 보면, 이와 같은 정보의 물질성을 간과하기 쉽다. 서버가 꺼지면 가상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히고, 하드디스크를 교체하거나 포맷하면 자성체의 특정한 배열도 사라지고, 물질적 기반에서 뿌리 뽑힌 정보도 연기처럼 사라진다.
1990년대 초, 오늘날과 같이 월드와이드웹(WWW)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의 텍스트 기반 게시판 서비스, 일명 PC통신이 유행했다. 파란 화면에 하얀 글씨만 찍히는 단순한 게시판 서비스였지만 많은 이들이 그 초보적인 가상공간에서 소식을 전하고 추억을 쌓았다.
그 가상공간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텍스트 기반 게시판들이 웹 기반 서비스에 밀려나면서 PC통신 회사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서버를 폐쇄했다. 서버가 사라지면서 그에 뿌리박고 자라났던 가상공간도 함께 사라졌다. 이렇게 가상공간의 서비스가 폐쇄되면서 거기 보관했던 개인의 추억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디지털 수몰민’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가상공간의 정보가 사실은 현실공간의 물질에 붙박인 채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정보통신기술과 같은 새로운 산업들이 제조업과 같은 오래된 산업과 맺고 있는 관계도 새삼 눈에 들어오게 된다.
새로운 산업과 오래된 산업
흔히 제조업은 ‘굴뚝산업’이고, 정보산업은 깨끗하고 스마트한(?) 산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정보산업의 많은 부분은 정보를 의탁할 물질적 기반을 갖추는 일, 즉 물건을 제조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이다. 우리가 편리하게 침대에 누워 무선인터넷으로 바깥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어른 팔뚝 굵기의 광케이블 다발이 온 세계의 해저 곳곳을 가로지르고 있는 덕분이다. 그 케이블을 깔고 유지·보수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것도 오래된 산업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구글이나 아마존과 같은 거대 인터넷기업은 엄청난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서버를 구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해 냉방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구글의 1호 데이터센터는 전세계 전력 사용량의 1.5%까지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고 한다. 웬만한 굴뚝산업의 에너지 소비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정보를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전자기기의 생산과 폐기도 역시 오래된 산업의 몫이다. 반도체의 생산과정에서 사용되는 독성 물질은 이미 여러 가지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한편 버려진 가전제품의 부품들은 개발도상국으로 모인다. 소량 사용된 금이나 희토류 금속과 같은 비싼 원소를 회수하기 위해서다. 선진국의 소비자들이 유행에 맞춰 신제품 전자기기로 갈아타는 이면에서,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은 해로운 약품으로 폐기판을 녹이고 미량의 금을 회수하고 있다. 속살을 들여다보면 정보통신산업도 기존 제조업 못지않게 환경에 부담을 주는 셈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누리는 가상세계의 편리함은 공짜가 아니다. 무선인터넷으로 주고받는 정보는 마치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는 양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자원을 소모하여 만들어낸 전기에너지와 기술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들어간 인간의 노동이 없었다면 열리지 않았을 결실이다. 가상세계도 그 뿌리는 현실에 박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상세계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누릴 때에도 현실세계의 유한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아끼며 사용한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