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과와 이과의 구분 어디서 비롯되었나

김태호 교수(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2018.11.05

문과는 칠판과 공책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공부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과는 국가 자원을 투입하여 진흥하고 국가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 대학의 일곱 개의 교양과목을 표현한 12세기 그림. 유럽의 모든 대학생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울러 익혔다. / wikipedia

중세 유럽 대학의 일곱 개의 교양과목을 표현한 12세기 그림. 유럽의 모든 대학생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울러 익혔다. / wikipedia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이과 이모티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원기둥이 눈물을 흘리며 “원통하다”고 하는 모습이라든가 단층 모양이 뛰어가며 “지각이다”라고 서두르는 모습 등을 귀엽게 표현했다. 어떤 이들은 마음에 쏙 든다며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역시 이과는 유별나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보다는 오래되었지만 인터넷에서는 ‘문과 이과 구별법’ 따위 제목을 단 우스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정의’라는 말을 듣고 ‘justice’를 떠올리면 문과, ‘definition’을 떠올리면 이과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농담이 세계 누구에게나 우스운 것은 아니다. 실은 우리가 이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한국이라는 독특한 맥락 덕택이다. 특정한 집단의 속성을 농담거리로 삼으려면, 그 집단이 사회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집단이라는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즉 이공계 정체성을 소재로 한 농담에 한국인 대부분이 반응한다는 것은 이공계가 특수한 집단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이공계 공통의 특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과와 문과가 별도의 집단이라는 생각은 언제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근대과학이 뿌리내리기 전에는 이 구별이 없었다. 중세유럽 대학에는 전공은 세 가지(법학, 의학, 신학)밖에 없었고 모든 학생들은 전공과정으로 올라가기 전에 일곱 가지의 교양과목을 들어야 했다. 그 가운데 오늘날의 문과에 해당하는 과목이 세 가지(문법, 논리학, 수사학)였고 이과에 해당하는 과목은 네 가지(산술, 기하, 천문학, 음악)였다.

‘이과 감성’이 따로 있을까

과학혁명을 거쳐 근대과학이 모습을 갖춘 뒤에도 한동안 문과계 사람과 이과계 사람을 나누어 생각하지는 않았다. 뉴턴이나 보일과 같은 근대과학의 선구자들은 스스로 철학의 일종인 ‘자연철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도 인간의 앎을 기억에 대한 것(역사), 이성에 대한 것(철학), 그리고 상상력에 대한 것(문학)으로 크게 나누었는데 오늘날의 생물학과 많이 겹치는 자연사는 기억에 대한 학문으로 분류된 반면, 수학과 물리학은 철학의 하위 분야로 분류되었다. 오늘날 역사·철학·문학은 문과로, 자연과학과 공학은 이과로 나누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현대 대학의 원형이 확립된 독일의 대학 개혁도 문과와 이과를 나누지는 않았고, 오히려 전인적 교양(Bildung)의 일부분으로서 과학교육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한국의 문과와 이과 구분은 아무래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1918년 제2차 고등학교령에서 ‘고등학교는 문과와 이과로 나눈다’는 규정을 두고 문과와 이과를 각각 ‘갑류’와 ‘을류’로 나누었다. 당시 일본에는 서양의 근대문명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영국이나 독일의 원어로 학문을 익혀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이에 따라 영어 문헌을 주로 읽는 학생들은 갑류, 독일어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을류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은 고등학교 본과 때부터 문과 갑류, 문과 을류, 이과 갑류, 이과 을류 등으로 나뉘어 공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뒷날 미국이 세계 학문을 지배하게 되면서 갑류와 을류 등 언어에 따른 구분은 사실상 의미를 잃게 되었지만,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오늘날까지도 일본 학교제도에 남아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교육제도가 이식된 한국도 이 구분을 오늘날까지 답습하고 있다.

왜 구태여 이와 같이 나누어야 했을까? 일설에 따르면 이렇게 문과와 이과를 나눈 이유 중 하나는 교육예산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공계 교육에는 실험실습 비용이 많이 들어가므로, 고등학교 진학 시점에 수학시험을 실시하여 ‘이과에 소질 있는’ 학생들을 가려내 그들에게 우선 예산을 집중 투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두 문화’ 넘어서려면

어찌 보면 이런 조치는 문과 이과 모두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과는 칠판과 공책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공부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과는 국가 자원을 투입하여 진흥하고 국가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부국강병의 길을 재촉하고 싶으나 자원이 충분치 않은 나라들의 조급함이 느껴지는 태도이기도 하다.

광복 후 한국에서도 문과 이과 구분이 오히려 더욱 강화되어 왔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경제발전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고 전인적 교양은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던 시절, 사실상 문과는 방치되었고 이과는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여겨져 왔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계와 이공계가 서로를 낯설게 여기는 것은 그 때문은 아닐까?

문과 이과 구분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면 늘 인용되곤 하는 찰스 스노의 <두 문화>(1959)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스노가 “과학자들의 무식함에 대하여 신이 나서 유감을 표명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싸늘한 반응밖에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이 질문은 마치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을 읽었습니까?”만큼이나 기초적인 질문이었다는 것이 스노가 느낀 두 문화의 간극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두 문화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인문계와 이공계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과 이과를 나누어 온 탓일 것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노의 책 제목은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상당히 도발적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문화’란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문학이나 철학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스노는 책 제목에서부터 과학도 이제 또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두 문화’라는 말은 누구나 공감하는 하나의 문화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비로소 거기에 기대어 성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두 문화를 이야기하려면, 우선 한국인 모두 공감하는 하나의 문화가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고유의 학문 전통을 세우지 못한 사회에서 문화로서의 과학을 이야기하고 문과와 이과 융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꿈은 아닐까?

<김태호 교수(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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