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기계를 뛰어넘어 인간과 어깨를 겨루려 한다고 느낄 때 인간은 인간이므로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과 맹목적인 찬탄은 모두 사기꾼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는 한 중국 기업을 둘러싼 작은 논란이 있었다. 중국어 음성인식기술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는 ‘아이플라이텍’에서는 중국어를 음성인식하고 딥러닝 기술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 말로 통역까지 해주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고, 이 기술을 이용한 동시통역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여했던 한 통역사가 자신이 통역한 내용을 회사가 인공지능이 한 것인 양 발표했다고 주장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아이플라이텍은 즉시 해명에 나섰고 기계 번역과 인간의 통역을 병행하여 사용했다는 설명으로 이야기는 일단락됐다.
작은 소동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흥미로운 논점을 상기시켜 준다. 기계가 해내지 못할 것이라 여겨왔던 일, 특히 인간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던 일을 해냈다는 소식을 접하면 인간은 낯설고 두려워한다. 그 다음에는 “정말 기계가 저걸 다 할 수 있을 리 없어”라며 의심한다. 의심의 단계를 지나면 어떤 이들은 불편하게 느끼고 계속 거리를 두고자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인간에게 훌쩍 가까워진 기계를 친근하게 느끼고 매료된다.
이렇게 두려움과 의심과 매료가 뒤섞인 감정들은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을 계기로 한국을 휩쓸었다. (이미 1997년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체스 세계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를 이겨 서구사회를 놀라게 한 일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체스의 인기가 높지 않았기에 전국민의 관심을 끄는 뉴스가 되지는 못했다.)
‘체스 두는 터키인’ 자동인형
‘인간에게 도전하는 기계’라는 생각은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다. 동서양의 고대신화나 전설 가운데도 마법이나 신통력으로 강한 힘을 얻은 기계인형의 이야기가 적지 않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고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다.
실제로 자동인형(오토마타)이 인간 또는 동물과 비슷한 일을 하여 인간을 놀라게 한 것은 기술이 발달한 뒤의 일이다. 1200년대 초 이슬람의 발명가 알자자리는 춤추는 자동인형으로 시각을 알리는 여러 가지 물시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은 이슬람 자동인형 기술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도 전해졌고,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에서도 그 영향을 일부 발견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중세 말과 르네상스 시대에 시계기술이 꽃을 피우면서, 톱니바퀴 등 정교한 금속부품을 이용한 자동인형이 크게 발달하였다. 데카르트가 <성찰>(1641년)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정교한 오토마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했는데, 이를 보면 당시 지식인들에게 자동인형이 만만치 않은 철학적 문제를 던져 주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는 왕과 귀족 등 부유한 후원자의 관심 속에 자동인형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자케-드로(Pierre Jaquet-Droz·1721~1790년)는 펜으로 잉크를 찍어 서명을 하는 자동인형이라든가 연필을 들고 소묘를 하는 자동인형 등을 남겼다.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1709~1782년)은 몸 안의 풀무로 공기를 내뱉고 손가락을 움직여 피리를 부는 정교한 자동인형을 만들었고, 심지어 모이를 먹고 소화관을 거쳐 똥(처럼 생긴 무언가)을 배설하는 오리인형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이렇게 화려한 오토마타들이 경쟁하던 와중, 1770년 빈의 쇤브룬 궁에서 볼프강 폰 켐펠렌(Wolfgang von Kempelen·1734∼1804년)이라는 이가 색다른 자동인형을 선보였다. 복잡한 기계장치로 가득 찬 커다란 나무상자 위에 터키인 남자 모습의 상반신이 얹혀 있는 이 자동인형은 켐펠렌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을 상대로 체스를 둘 수 있었다. 자케-드로나 보캉송의 자동인형이 매우 정교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사전에 정해 놓은 동작만을 할 수 있던 데 비해 사람을 상대로 상황에 맞추어 체스를 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시대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
구경꾼들은 반신반의하며 체스 두는 터키인 인형에게 도전했고 놀랍게도 대부분 30분 안에 두 손을 들었다. 자동인형을 떠보고자 반칙을 하면 인형은 눈을 부릅뜨고 잘못 움직인 말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터키인(The Turk)’은 유럽의 명물이 되었고 켐펠렌은 합스부르크 황제 요제프 2세의 명에 따라 유럽을 일주하며 전시와 대국에 나섰다.
체스 두는 터키인의 비밀은 켐펠렌의 사후 몇 차례 주인이 바뀌고 이 인형이 사실상 잊힌 채 박물관의 화재로 소실된 다음인 1857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시피, 자동인형이 스스로 생각하여 체스를 두는 것은 아니었다. 기계 안의 작은 방에 숨어 있던 사람이 행마를 판단하고 기계를 조종하여 말을 움직인 것이었다.
켐펠렌은 사기꾼인가? 안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숨기고 자동인형을 공개해 이름을 얻었다는 점에서는 사기라고 할 수 있지만 켐펠렌 스스로는 일종의 마술사로 처신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에게 이 자동인형은 관객들과 함께 즐기는 일종의 수수께끼였을 수도 있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말 유럽의 들뜬 분위기였다. 근대과학이 기틀을 다지고 막 성과를 낼 무렵 유럽인들은 새로운 물리학과 화학에 경탄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신기한 식물과 괴이한 동물에 열광했다. 마치 요즘 ‘4차 산업혁명’ 이야기에 누구나 한마디씩 거들고 나서는 것과 비슷하게 새로운 과학기술과 발명과 발견이 열어줄 신세계에 대해 희망과 열광이 넘쳤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갑자기 웃자란 과학기술과 그것이 가져올 낯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싹트고 있었다. 체스 두는 터키인 인형은 그 틈새를 파고들었고 잠재된 두려움만큼 큰 환영을 받았다.
기계가 기계를 뛰어넘어 인간과 어깨를 겨루려 한다고 느낄 때 인간은 인간이므로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과 맹목적인 찬탄은 모두 사기꾼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예전에도 그랬듯,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급변하는 과학기술의 시대를 헤쳐나갈 유일한 왕도가 아닐까.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